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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역사> [11월 15일] 1864년, 셔먼 대서양 진격 개시. 총력전의 시작: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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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역사> [11월 15일] 1864년, 셔먼 대서양 진격 개시. 총력전의 시작

김종현 | 기사입력 2009/11/14 [21:50]

<오늘의역사> [11월 15일] 1864년, 셔먼 대서양 진격 개시. 총력전의 시작

김종현 | 입력 : 2009/11/14 [21:50]

1864년 11월 15일, 남북전쟁 중 애틀랜타를 점령한 북군 미시시피 군관구 사령관 윌리엄 테쿰세 셔먼 소장은 6만 2천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애틀랜타를 떠나 조지아 주를 유린하며 대서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보통 "셔먼의 대서양 진격" 또는 "바다로 진격"(Sherman's March to the Sea)이라고 불리는 이 전역은 남군이 아니라 남부동맹 후방을 파괴하여 남부동맹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파괴할 목적으로 수행된 것이다. 이미 자원 및 인력이 고갈되면서 전쟁에서 밀리고 있던 남부동맹은 셔먼의 이번 작전으로 완전히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했고, 결국 1865년 4월에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로버트 리가 애포매톡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나게 된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1820년 2월 8일 ~ 1891년 2월 14일. (출처:영어 위키피디어)

제2차 세계 대전부터 전쟁은 최전선의 군대 간에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국의 후방에 위치한 산업 시설, 도로 및 교량, 철도망, 통신망 등을 파괴하여 상대방의 전쟁 수행 능력을 소멸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커벤트리 폭격이나 함부르크 폭격,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처럼 민간인들까지 목표로 한 무차별 공습을 단행하는 것도 적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떨어뜨리는 목적으로 수행된 것이다. 셔먼이 1864년 ~ 1865년 초까지 조지아 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리니아 주를 휩쓴 이 작전은 현대전의 전략을 서양인들에게 19세기 중반에 제시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사실 유목민족 계열이 한반도 침략 시에 이러한 전략을 구사한 바 있지만 (몽골군이 강화도를 포기하고, 대신에 고려 각지를 돌며 약탈하고 유린하면서 고려 조정의 환도를 요구한 것), 현대화된 군사 전략으로 정립된 것은 셔먼의 이 원정이다.

셔먼이 예하 부대에 내린 Special Field Order 120(1864년 11월 9일)에는 다음과 같이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
IV. 각 부대는 행군 도중 자유롭게 약탈하라
V. 각 군단 지휘관들에게 창고, 집, 면화 등을 자유롭게 파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VI. 기병대 및 포병대는 말, 당나귀, 그리고 마차를 자유롭게 무제한으로 약탈해도 좋다.

셔먼은 북부 후방으로부터 병참 지원은 포기하고 병사들에게 20일치 식량을 준비시켰을 뿐이다.120호 명령서를 통해 셔먼은 나머지 필요한 식량 및 물건은 모두 진격 도중에 약탈(현지조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병사들은 명령서에서 허용한 범위보다 더 많이 약탈하고 더 많이 파괴했다.

셔먼은 부하들의 파괴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부하들의 증오심은 내가 목적했던 반란군의 격파, 남부 국민들의 오만을 겸손으로 바꾸는 일, 그리고 그들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셔먼은 본 작전의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적군과 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시민들과도 전쟁을 하고 있다. ...(중략)... 그들 모두에게 전쟁의 쓰디슨 맛을 보게 해야 한다. ...(중략)...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남부인들의 전쟁 역량도 아울러 파괴해야 한다. 공장, 철도, 농장 나아가 그들의 저항의까지도 분쇄해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

결국 셔먼은 현대전의 기본 개념을 분명히 정립했으며, 또한 실천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남부는 그런 셔먼에 대항할 수단을 갖지 못했다.

애틀랜타 방위와 애틀랜타에서 쫓겨 달아났던 남군의 후드에 대한 대책은 펩 토머스에게 6만의 병력을 주어 남기는 것으로 대책을 마무리했다. 후드 정도는 토마스가 처리하면 될 인물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12월에 펩 토마스는 친구이자 상관인 셔먼의 신뢰에 대하여 후드군을 전멸시켜서 보답했다. 셔먼은 6만 2천의 병력을 4개 군단으로 편성하고, 1개 기병사단으로 2개 군단씩 편성된 좌우익 부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셔먼에 대한 호위는 노예주인 앨라배마 주 출신이면서도 연방주의자들로서 북군에 가담한 1 앨라배머 기병연대(1st Alabama Cavalry Regiment)가 맡았다. 

셔먼의 목표는 조지아 주를 가로질러 조지아 주 동남부 해안가이자 서배너 강 하구에 위치한 서배너(Savannah) 라는 항구도시였다. 이곳을 점령하면 바다는 이미 북군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현지조달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뿐더러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동서로 조각난 남부가 이제는 조지아 주를 중심으로 다시 남북으로 분단되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고 서배너 강을 건너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로서, 셔먼은 거기서 다시 북상하여 피터스버그에서 리를 붙잡고 있는 그랜트와 합류할 계획까지 세웠다. 행군 거리는 총 480km였다.

애틀랜타를 점령하며 사기가 드높았던 잘 무장된 북군 62,000명을 상대할 남군의 전력은 형편없었다. 애틀랜타에서 셔면에게 쫓겨 달아난 후드는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히려 북쪽 테네시 주로 침공했다. 셔먼을 맞아 싸울 부대라고는 조지아 주 민병대 3000여명과 클래이튼 카운티(Clayton County)의 러브조이(Lovejoy)에 배치된 13,000여명, 휠러 휘하 기병대 10,000여명이 전부였다. 그나마 민병대는 대부분 어린 소년과 노인들로 구성되었다.

서배너를 목표로 진격하는 셔먼 휘하 4개 군단은 진격로 상에 위치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약탈하거나 불태워버렸다. 북군 진격로 주변은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셔먼은 부하들에게 "최소 10일 분의 식량을 현지 조달"하도록 하고, "민가에 불법침입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지만, 실제 병사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뭐든지 약탈했다. 이를 막아야 할 남군은 곳곳에서 저항했으나 서면군의 진격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11월 22일 조지아 주 민병대와 전투가 벌어졌지만, 북군은 큰 피해없이 민병대를 물리쳤고, 이후 이따끔 휠러 기병대가 공격해왔으나 역시 셔먼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다.

12월 21일, 셔먼군은 드디어 서배너를 점령했다. 이로써 셔먼은 목표했던 점령지를 장악했지만, 단순히 항구도시 하나를 점령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셔먼군의 진격을 보면서 남부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깨달았다. 셔먼군이 마음껏 남부동맹 후방 한복판에서 남부를 약탈하고 파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막을 남군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남부동맹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2월 6일 의회연설에서 결코 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서배너에 주둔하고 있던 셔먼은 데이비스의 발언을 듣고 이번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유린하기로 결정했다. 1865년 2월 21일, 셔먼군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진격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조지아 주보다 더 심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남북전쟁을 직접 일으킨 당사자였기 때문이다.(주:남북전쟁이 시작된 섬터 요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 항 앞바다에 위치한 요새로, 섬터요새를 포격한 부대도 사우스캐롤라이나 군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도 조지아에서처럼 셔먼을 저지할 남군이 없었다. 셔먼을 저지해야 할 남군 사령관 조셉 존스턴(Joseph Jonstern) 장군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고작 2만여명의 병력에 불과했다. 존스턴은 3월 19일에 북군 좌익을 공격했지만 증강된 북군에 패하여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셔먼은 남군을 무시하고 북쪽으로 계속 진군했다. 셔먼군의 진격에 위협받은 로버트 리(Robert Lee)는 결국 몇 달째 식량도 떨어진 채 버텨오던 피터스버그에서 4월 초 철수해야 했다. 그랜트는 지체없이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공격했고, 애포매톡스까지 쫓겨갔다가 그랜트에게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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