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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JP)의 별세로 40년간 이어졌던 '3김시대' 종언 고해: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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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JP)의 별세로 40년간 이어졌던 '3김시대' 종언 고해

쿠데타와 민주화 압박의 상징이면서 산업화를 이룬 인물로 상반된 평가받아

강홍구 | 기사입력 2018/06/24 [15:47]

김종필(JP)의 별세로 40년간 이어졌던 '3김시대' 종언 고해

쿠데타와 민주화 압박의 상징이면서 산업화를 이룬 인물로 상반된 평가받아

강홍구 | 입력 : 2018/06/24 [15:47]
<사진/-왼쪽부터 김종필.김영삼.김대중, 중간-지난 1월 김종필 전 총리를 찾은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
지난 23,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별세하면서 60년대부터 한국 현대정치를 지배했던 ‘3()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김 전 총리에 앞서 지난 2009년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이어 2015년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먼저 유명을 달리했다.김 전 총리가 별세하면서 동교동계(DJ), 상도동계(YS), 청구동계(JP)로 일컬어지던 3김의 정치 일정은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다.

1961, JP는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고, DJYS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치면서 야권의 지도자로 떠올랐다.1979, 박 전 대통령이 10.26사태로 사망하자 3김은 서울의 봄을 맞았으나 12.12쿠데타와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으로 가혹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DJ는 내란음모죄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고, YS는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으며 JP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당시 JP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며 당시 서울의 봄을 평하기도 했다. 19876.10민주화 항쟁이후 3김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섰는데,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 당시 여당 민정당 후보와 대권을 놓고 경쟁했다.

3김은 19884, 총선에서 YS(통일민주당), DJ(평민당), JP(신민주공화당)는 각각 영남, 호남, 충청의 표를 결집하면서 지역주의와 소선거구제의 독식 구조를 만들었다.1990, JPYS와 총선에서의 민의를 거스르면서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합당에 참여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1992, 대선에서 YS는 민자당 후보로 출마해 야당후보인 DJ를 누르고 당선됐는데, YS의 당선에는 JP의 힘이 컸다.

JPYS는 초반엔 협력 관계를 유지했으나 1995, JP가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면서 다시 결별했다.

JP1997년 대선에서 DJ의 손을 잡고 ‘DJP 연합을 통해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어 DJ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기여했다.JPDJ정부 초대 총리가 됐지만 20019, 내각제 개헌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DJP 공조 파기를 선언하고 자민련 총재로서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2004, 총선에서 참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JP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5.16 군사쿠데타의 기획자이면서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민주주의를 퇴행시켰다는 평가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의 산업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이해론도 있다.

또한, 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YS.DJ와 함께 만들어간 3김 시대는 민주화에 이바지했다는 긍정론과 함께 영남.호남.충청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패권주의와 보스계파정치의 폐해를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있다.어쨌든 JP의 별세로 40년 동안 이어졌던 ‘3김 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됐다.

<강홍구 기자/hg71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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