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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역사> [12월 2일], 1922년 조선사편수회 설치 공표.: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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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역사> [12월 2일], 1922년 조선사편수회 설치 공표.

김종현 | 기사입력 2009/12/04 [05:27]

<오늘의역사> [12월 2일], 1922년 조선사편수회 설치 공표.

김종현 | 입력 : 2009/12/04 [05:27]
1922 년 12월 4일, 일본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총독부훈령 64호)을 발표하여 조선사편수회 설치를 공표했다. 이로써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일본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가 본격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 어 1925년 6월 일왕 히로히토의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를 설치하라는 칙령 218호에 따라 조선사 편수회를 총독부 내 부서에서 총독부 직할 독립 관청으로 확대했다. 조선사편수회 설치 목적은 조선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미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에서 시작한 일본의 한국 역사 왜곡 작업의 한 부분이다. 1937년까지 당시 기준으로 97만 5534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조선사》 35편,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623을 편찬했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과 함께 해체되었다.

일 본은 데라우치 마사유키 1대 총독때부터 일찌감치 식민 통치에 필요한 역사 자료를 수집하는 업무를 담당한 취조국을 총독부 내에 부서로 두고 구관제도조사사업(舊慣制度調査事業)과 고적(古蹟)조사사업을 시작했다. 데라우치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에게 일본혼을 심어 줘야한다. 그렇지  않고 조선인의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일이므로 영구적이며 근본적인 사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조선인의 심리연구이  역사연구이다.

- KBS역사스페셜 2006년 9월 29일 방영, <제64편, 일왕의 명령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라


1915 년 중추원이 구관조사사업을 넘겨받아 산하 부서로 편찬과를 신설하여  ≪조선반도사 朝鮮半島史≫ 편찬 사업을 시작했다. 중추원이 이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질질 끄는 사이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을 겪은 총독부는 무단정치를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유화정책을 펼치면서 한편으로 한민족을 완전한 노예로 길들이기 위해 한민족의 역사 의식과 민족혼을 제거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

이 무렵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강조한 박은식의 《한국통사》도 국내에 들어와 큰 반향을 일으키자 조선총독부는 저으기 당황했다. 중추원에서 진행하던 사업이 방해단 분량으로 지지부진하자 다급해진 조선총독부는 아예 직접 편찬 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관의 권위와 편찬 담당자들의 지위를 높이고, 공정하게 작업한다는 인상을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인들이 그 의도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총독부는 1925년 6월 칙령으로 총독부 산하 부서에서 독립관청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반도사의 편찬 요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 한국인의 역사 의식을 흐리게 하여 장기 식민지화의 포석을 굳히는 데 이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에 있어서의 야만(野蠻)적이고 반(半) 개화된 민족과 달라서 독서속문(讀書屬文, 독서문화)에 있어서 문명인에 떨어지는 바가 없다. 고래로 사서의 존재하는 바 많고, 또 새로이 저작되는 바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자는 독립 시대의 저술로서 현대와의 관계를 결하여 다만 독립국의 구몽을 추상시키는 폐단이 있으며, 후자는 근대 조선에 있어서의 일청, 일러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의 향배를 말하고, 혹은 《한국통사》라고 하는 재외 조선인의 저서와 같은 것은 일의 진상을 살피지 아니하고 망설을 함부로 한다. 이들의 서적이 인심을 어지럽히는 해독은 참으로 말할 수 없는 바 있다
."


도쿄외국어대학 동양사전공 나카미 다츠오 교수도 KBS 역사스페셜팀과 인터뷰에서 "한국의 역사를 식민지 지배자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조선사편수회입니다"[각주:1]라고 조선사편수회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했다.

이만열 교수는 이렇게 정리했다.
과 거의 그렇게 역사가 전개되어 타율적으로 전개되어 왔으니까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도 한국의 역사의 입장에서는 그건 이상한 것이 아니다.그건 정상적인 것이다, 라고 하는 논리가 나올 수가 있고 또 하나는 과거에는 중국 과 만주, 몽고의 정복주의적이고 야만적인 지배를 받았는데 이제 우리 일본의 온정주의적이고 문명개화한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까 한국의 역사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찬스를 맞은 것이다."

KBS역사스페셜 2006년 9월 29일 방영, <제64편, 일왕의 명령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라>
 

조 선사편수회 회장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을 역임했다는 데서도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는 당연하다"라는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게다가 민족의식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친일파 이완용, 권중효, 박영효가 편수회 고문이었으니, 결과물의 용도 및 목적은 누가봐도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편찬 실무는 일본인 학자와 한국인 학자들이 수사관 및 수사관보로써 참여하여 담당했다. 이들 중에는 이병도도 있다. 이병도는 4년만 활동하고 그만두었다고 하나, 현재까지 이병도가 사직하거나 해직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무보수 촉탁으로 1938년까지 일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조 선사 편수회는 총 사업 기간은 10년으로 정하고, 기초 작업으로 1차 사료 수집사업을 대규모로 진행했다. 그리하여 일본·한반도·만주 각지에서 기록·고문서·사적(史籍) 문집·영정(影幀)·고지도·탁본(拓本) 등을 광범위하게 구입하고 지방사 자료와 개인 소장의 사료는 빌리거나 복사(당시 기술로는 등사)하는 등의 방법으로 수집했다. 특히 쓰시마에서도 많은 사료를 수집했는데, 조선사에서 조선과 관계 깊은 쓰시마도주(對馬島主)의 고문서 자료를 구입하였다(고문서류 61,469枚, 고기록류 3,576책, 고지도 34매, 고서화 18권과 53매). 원활한 자료 수집을 위해 조선 총독부는 전국의 도·군·경찰서 등 지방 관청에 협력할 것을 강력히 지시하기도 했다.

사 료가 점차 수집됨에 1927년 6월부터 편수 실무를 진행했고,1938년 마침내 전 37책으로 된 ≪조선사≫가 편찬 간행되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일본인 위원과 한국인 위원 사이에는 고조선 문제나 민족성 배제 문제를 가지고 상당한 논쟁도 있었으나 결국은 조선총독부 의도대로 편찬되었다. 특히《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간 앞장서서 관여했던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한국사의 왜곡과 말살을 주도했다. 이병도는 초기에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나중에 이마니시의 수사관보로 승격했으며, 이마니시를 도와 1,2,3권 편집에 깊이 관여했다. 일본은 단군조선의 상한선을 끌어내리는데 열심이었던 이마니시 밑에서 이병도는 식민사관 수립에 적극 기여했던 것이다. 이병도의 학설 중 교과서에까지 실린 대표 학설이 고조선 대동강 유역설이다.

조 선사의 편간 이후 관변사료(官邊史料)의 열람을 극도로 봉쇄하니 연구자들은 ≪조선사≫를 자료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선사는 통사이긴 하지만, 일본에 유리하거나, 조선에 불리한 사료 중심으로 취사선택하였기 때문에 철저하게 일본의 식민통치에 유리하게 만들어진 결함 투성이 편사이다. 게다가 데라우치가 약탈해간 1차 사료들 대부분은 여전히 일본에 있으며 공개하지 않고 있다.

조 선사편수회는 조선사 편수를 위해 수집한 사료 가운데 20종을 택해 ≪조선사료총간 朝鮮史料叢刊≫을 엮어서 편찬하고, 동시에 3책으로 된 귀중 기록·고문서·사적·필적·화상 등은 콜로타이프 판으로 ≪조선사료집진 朝鮮史料集眞≫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간행하기도 했다.

참고: 조선사편수회의 1925년 이후 가담인물들[각주:2]
조선사 편수회 내에서 인원 변동은 있지만, 조선사편찬위원회 시절보다 대략 3배 가까운 인력이 왜곡 작업에 열중했다. 물론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넘어온 인간들도 있다. 또 아래 목록에는 편수회 내에서 승진내역도 반영되어 있다(예:이병도)

1) 회장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겸임)
  • 시모오카 주지 (1925년 6월 6일 ~ 11월 22일)
  • 유아사 구라헤이 (1925년 12월 3일 ~ 1927년 12월 23일)
  • 이케가미 시로 (1927년 12월 23일 ~ 1929년 4월 4일)
  • 고다마 히데오 (1929년 6월 22일 ~ 1931년 6월 19일)
  • 이마이다 기요노리 (1931년 6월 19일 ~ 1936년 8월 5일)
  • 오노 로쿠이치로 (1936년 8월 5일 ~ )
2) 고문
  • 이완용 (1925년 7월 20일 ~ 1926년 2월 12일)
  • 권중현 (1925년 7월 20일 ~ 1934년 3월 19일)
  • 박영효 (1925년 7월 20일 ~ 1939년)
  • 나이토 도라지로 (1925년 9월 22일 ~ 1934년 6월 26일)
  • 핫토리 우노키치 (1925년 9월 22일 ~ )
  • 구로이타 가쓰미 (1925년 9월 22일 ~ )
  • 야마다 사부로 (1933년 9월 8일 ~ 1936년 1월 16일)
  • 이윤용 (1934년 4월 17일 ~)
  • 하야미 히로시 (1936년 3월 7일 ~ )
3) 위원
  •  이쿠타 세이자부로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1월 8일)
  • 시노다 지사쿠 (1925년 7월 20일 ~ )
  • 이진호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월 19일)
  • 오다 쇼고 (1925년 7월 20일 ~ )
  • 유맹 (1925년 7월 20일 ~ 1930년 3월 21일)
  • 어윤적 (1925년 7월 20일 ~ 1935년 3월 7일)
  • 이마니시 류 (1925년 7월 20일 ~ 1932년 5월 20일)
  • 야마자키 마사오 (1925년 7월 20일 ~ 1928년 3월 30일)
  • 이능화 (1925년 7월 20일 ~ )
  • 이병소 (1925년 7월 20일 ~ )
  • 윤영구 (1925년 7월 20일 ~ )
  • 고타케 마사요시 (1928년 5월 22일 ~ 1929년 10월 28일)
  • 최남선 (1928년 12월 20일 ~ )
  • 이마무라 다케시 (1929년 12월 4일 ~ 1931년 7월 22일)
  • 다케베 긴이치 (1929년 12월 5일 ~ 1931년 7월 1일)
  • 하리마 겐시로 (1930년 1월 18일 ~ 1932년 2월 12일)
  • 하야시 한조 (1930년 7월 15일 ~ 1937년 10월 30일)
  • 우시지마 쇼조 (1931년 11월 7일 ~ 1936년 5월 21일)
  • 하야시 시게키 (1931년 11월 7일 ~ 1933년 8월 4일)
  • 오타니 쇼신 (1931년 11월 7일 ~ )
  • 마쓰모토 이오리 (1932년 3월 4일 ~ 1934년 11월 5일)
  • 후지타 료사쿠 (1933년 4월 13일 ~ )
  • 와타나베 도요히코 (1933년 9월 8일 ~ 1936년 5월 21일)
  • 오타케 주로 (1936년 6월 3일 ~ )
  • 도미나가 후미카즈 (1936년 6월 3일 ~ 1937년 7월 3일)
  • 나가타 나오마사 (1937년 11월 9일 ~ )
4) 간사
  • 야마자키 마사오 (1925년 7월 20일 ~ 1928년 3월 31일)
  • 김동준 (1925년 7월 21일 ~ 1925년 9월 10일)
  • 이나바 이와키치 (1925년 7월 21일 ~ 1937년 6월 26일)
  • 정교원 (1925년 9월 18일 ~ 1928년 3월 30일)
  • 다카타케 사토미 (1928년 5월 22일 ~ 1929년 10월 28일)
  • 이동진 (1928년 5월 22일 ~ 1928년 7월 27일)
  • 손영목 (1928년 12월 4일 ~ 1929년 10월 28일)
  • 엄창섭 (1929년 12월 3일 ~ 1934년 12월 12일)
  • 하리마 겐시로 (1929년 12월 12일 ~ 1932년 2월 12일)
  • 마쓰모토 이오리 (1932년 2월 16일 ~ 1934년 11월 5일)
  • 가미다키 모토이 (1933년 12월 8일 ~ 1936년 6월 3일)
  • 김대우 (1934년 2월 15일 ~ 1936년 5월 28일)
  • 노세타니 간료 (1934년 12월 12일 ~ )
  • 신구 하지메 (1936년 6월 30일 ~ 1937년 7월 3일)
  • 김병욱 (1936년 7월 17일 ~ )
5) 수사관
  • 이나바 이와키치 (1925년 6월 25일 ~ 1937년 6월 26일)
     
  • 후지타 료사쿠 (1925년 6월 25일 ~ 1926년 6월 23일)
     
  • 홍희 (1925년 6월 25일 ~ 1935년 1월 7일)
     
  • 나카무라 에이코 (1928년 12월 27일 ~ 1937년 6월 26일)
     
  • 스에마쓰 야스카즈 (1935년 4월 13일 ~ 1935년 6월 8일)
     
  • 가쓰라기 스에지 (1936년 8월 22일 ~ 1937년 3월 31일)
     
  • 신석호 (1938년 9월 22일 ~ )
6) 수사관보
  • 다카하시 다쿠지 (1925년 6월 6일 ~ 1933년 6월 30일)
     
  • 가쓰라기 스에지 (1925년 8월 8일 ~ 1936년 8월 22일)
     
  • 이병도 (1925년 8월 8일 ~ 1927년 5월 30일)
     
  • 쓰루미 다쓰키치 (1925년 8월 18일 ~ 1928년 4월 14일)
     
  • 우시오다 후키조 (1927년 5월 31일 ~ 1927년 8월 24일)
     
  • 스에마쓰 야스카즈 (1928년 3월 21일 ~ 1935년 4월 13일)
     
  • 신석호 (1930년 5월 2일 ~ 1937년 9월 22일)
     
  • 하기와라 히데오 (1933년 6월 31일 ~ 1936년 3월 6일)
     
  • 다가와 고조 (1935년 4월 12일 ~ )
     
  • 이종명 (1936년 3월 12일 ~ 1937년 5월 10일)
7) 서기
  • 현양섭 (1925년 6월 6일 ~ 1934년 8월 28일)
     
  • 가네코 마사키요 (1925년 8월 18일 ~ 1928년 3월 18일)
     
  • 김용적 (1925년 8월 18일 ~ 1930년 12월 23일)
     
  • 오노 도쿠조 (1925년 9월 28일 ~ 1929년 4월 5일)
     
  • 가쓰라기 스에지 (1929년 2월 17일 ~ 1936년 8월 22일)
     
  • 가치 세이지로 (1933년 7월 14일 ~ )
     
  • 마에다 고조 (1935년 4월 12일 ~ )
8) 촉탁위원
  • 이나바 이와키치 (1925년 6월 6일 ~ 1925년 6월 25일)
  • 사사카와 다네오 (1925년 6월 6일 ~ 1925년 8월 31일)
  • 홍희 (1925년 6월 6일 ~ 1925년 6월 25일)
  • 세노 바유 (1925년 6월 6일 ~ 1935년 5월 20일)
  • 이와타니 다케이치 (1925년 7월 25일 ~ 1928년 6월 6일)
  • 가와구치 우키쓰 (1925년 7월 25일 ~ 1931년 12월 17일)
  • 시부에 게이조 (1925년 11월 4일 ~ 1934년 4월 16일)
  • 나카무라 에이코 (1926년 5월 31일 ~ 1927년 12월 31일)
  • 이마니시 류 (1926년 9월 28일 ~ 1932년 5월 20일)
  • 박용구 (1926년 12월 31일 ~ 1932년 1월 23일)
  • 스에마쓰 야스카즈 (1927년 5월 13일 ~ 1928년 3월 21일)
  • 이병도 (1927년 5월 31일 ~ )
  • 육종윤 (1927년 6월 10일 ~ 1927년 7월 20일)
  • 권중익 (1927년 7월 31일 ~ 1927년 12월 16일)
  • 김태두 (1927년 10월 20일 ~ 1928년 12월 20일)
  • 조중관 (1928년 3월 31일 ~ 1932년 1월 23일)
  • 최남선 (1928년 10월 8일 ~ 1936년 6월 25일)
  • 신석호 (1929년 4월 27일 ~ 1930년 5월 2일)
  • 하기와라 히데오 (1929년 6월 17일 ~ 1933년 6월 31일)
  • 구찬서 (1929년 6월 20일 ~ 1936년 4월 23일)
  • 조한직 (1929년 12월 31일 ~ 1938년 3월 15일)
  • 윤용균 (1930년 4월 15일 ~ 1931년 9월 14일)
  • 이마무라 도모 (1930년 7월 21일 ~ 1931년 12월 21일)
  • 소노다 요지로 (1931년 9월 30일 ~ )
  • 마에다 고조 (1932년 12월 31일 ~ 1935년 4월 12일)
  • 다보하시 기요시 (1933년 3월 15일 ~ )
  • 다가와 고조 (1933년 3월 31일 ~ 1935년 4월 12일)
  • 스도 요시유키 (1933년 9월 15일 ~ 1936년 10월 24일)
  • 마루가메 긴사쿠 (1933년 9월 15일 ~ )
  • 구로다 쇼조 (1934년 4월 30일 ~ )
  • 이시하라 도시오 (1934년 4월 30일 ~ 1937년 3월 15일)
  • 마쓰오카 이와오 (1934년 6월 18일 ~ 1936년 11월 29일)
  • 스에마쓰 야스카즈 (1935년 6월 18일 ~ )
  • 다나카 한지로 (1936년 6월 30일 ~ 1937년 3월 15일)
  • 후지이 세이치 (1936년 6월 30일 ~ 1937년 3월 15일)
  • 이나바 이와키치 (1937년 6월 26일 ~ )
  • 나카무라 에이코 (1937년 6월 26일 ~ )
     
  1. KBS역사스페셜 2006년 9월 29일 방영, <제64편, 일왕의 명령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라> [본문으로]
  2.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조선사편수회 문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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