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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월 27일] 1989년, 장세동 전 안기부장 구속: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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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월 27일] 1989년, 장세동 전 안기부장 구속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1/26 [02:18]

<오늘의 역사> [1월 27일] 1989년, 장세동 전 안기부장 구속

김종현 | 입력 : 2010/01/26 [02:18]

1989년 1월 27일, 검찰은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현재 국가정보원)을 직권 남용 혐의로 구속했다. 1988년 12월 10일 발족한 검찰의 "5공비리 특별수사부"의 수사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의 실세로서 육군 중장으로 전역했으며,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지냈다. 전두환과 장세동의 인연은 베트남 전쟁 당시 육군 대위로 중대장이었던 장세동이 부상을 입고 군병원에 입원했을때 전두환이 그를 찾아갔던 것에서 시작한다. 이후 군 복무기간 중 여러 차례 전두환을 직속상관으로 모시고 근무했으며, 전두환이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지내며 정권 막후 실세로 등장했던 것이다.

1988년 6월 27일, 국회는 5공비리 특별위원회(5공비리특위)를 구성했다. 노태우 정권이 전두환 정권과 선을 긋기 위해 의도한 결과였다. 5공비리특위는 7월 23일 4당(민정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간사회의를 열었다. 간사회의에서는 산하에 4개의 소위원회를 두고, 각 분야별 비리를 조사하기로 했다. 제1소위원회는 정치 권력 비리, 제2소위원회는 경제 비리, 제3소위원회는 인권 및 인사 비리, 제4소위원회는 사회 및 기타 비리를 다루게 되었고 전체 위원장은 통일민주당의 이기택 의원이 맡기로 했다. 조사대상은 1차로 일해재단(日海財團), 새세대 심장재단, 새마을본부, 전두환 일가 해외 재산 도피, 연희동 사저, 노량진 수산 시장 비리, 국제그룹 등의 부실 기업 정리, 삼청 교육대, 미국 노스럽사(社) 전투기 도입 스캔들 등 44건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5공비리 특위는 1989년 2월 13일 민정당 소속 위원들이 멋대로 특위 종결을 선언하고 탈퇴하면서 유야무야 되었으며, 3월 22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하면서 비리들을 속시원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이해 말에 잠시 국회 5공비리 청문회가 다시 열리기도 했으나, 청문회 증인으로 출두한 전두환은 모든 비리 의혹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으며, 이때문에 5공 비리는 속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은 미제 상태로 남아 있다(훗날 전두환은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는 발언을 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5공비리 특위가 한참 활발하게 활동할 무렵, 검찰에는 5공비리 특별수사부가 설치되었다. 일요신문의 기획 기사에 따르면, 특별수사부는 노태우에게 구속 대상을 보고한 후 승인을 받아 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세동은 일해비리 재단 문제 등으로 전경환을 비롯한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 10명, 이학봉 전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등 모두 47명이 구속될때 같이 구속되었다. 장세동은 자신의 구속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강경하게 대응하려고 했다. 허문도 같은 경우는 은근히 노태우를 협박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백담사에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전두환이 만류하자 순순히 구속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장세동은 전두환을 보호하고자 끝까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1993년 이른바 "용팔이 사건"으로 구속당할때에도 "자기 배후는 없다"며 끝까지 모든 책임을 자신이 뒤집어 썼다.

1988년 말, 국회 5공비리 청문회에 출두한 장세동은 당당하게 특위 소속 위원들과 맞섰다. 그런 장세동을 날카롭게 압박하며 추궁하여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사람이 있다.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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