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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월 28일] 1932년, 일본군 상해 침공.: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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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월 28일] 1932년, 일본군 상해 침공.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1/26 [20:54]

<오늘의 역사> [1월 28일] 1932년, 일본군 상해 침공.

김종현 | 입력 : 2010/01/26 [20:54]

1932년 1월 28일, 상하이의 일본 조계를 경비하던 일본 해군 육전대가 중국 국민당군 19로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3월 2일까지 계속된 이른바 1.28 사건(중국측 명칭)의 시작이었다.


(상해 시내에서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전투 중인 중국 19로군)

1월 28일부터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중국은 1.28 사건이라고 하고, 서양에서는 1932년 상하이 전쟁(the Shanghai War of 1932) 또는 상하이 사건(Shanghai Incident)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이라고 한다.

일본은 만주국을 수립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 대륙에 영향력을 증대시킬 계획을 꾸몄다. 일본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대의명분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상하이에서 반일 사건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다. 1월 18일, 다섯 명의 일본인 승려가 삼우실업사(三友實業社) 근처에서 일본에 매수된 중국인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몇 시간도 안되어 일본인 청년들이 삼우실업사를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상해공공조계순포방(上海公共租界巡捕房) 경찰관 1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쳤다. 상하이 중국인들은 이를 계기로 반일 거리 시위에 나섯으며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외치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이르러 상황은 악화되었다. 일본군은 이미 병력을 상하이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당시 상하이의 일본 조계에는 일본 해군 육전대 1,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병력 외에 7천명의 병력과 30척의 군함, 45대의 항공기를 추가로 폭동을 방지하고 거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상하이로 집결시켰다. 이 중에는 항공모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상하이 공공 조계 자치위원회(Shanghai Municipal Council)에 중국을 비난하고 배상금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중국 정부는 상하이의 반일 운동을 진정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1월 28일, 상하이 조계 자치위원회는 일본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였다.

그러는 사이 중국 국민당군 19로군이 상하이 외곽에 집결했다. 19로군은 약 33,000여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상하이 국제 조계 측은 19로군을 일본군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상하이 조계측은 19로군에 뇌물을 주어 일본의 공격을 유발하지 않고 상하이에서 철수하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1월 28일 늦은 밤에 항공모함 함재기를 동원하여 상하이를 폭격했다. 극동에서 처음 항공모함을 실전에 투입한 사건이었다. 이어 일본군 3,000여명이 상하이 시내로 진격하여 미리 정해둔 여러 목표물을 공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19로군은 도시를 버리고 떠나지 않고 침략군에 격렬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국제 조계 지구의 입구에 해당하는 훙커우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 양군은 곧 상하이 전체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전쟁을 멈추도록 중재에 나섰지만, 일본은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2월 12일, 일본은 중국군에게 상하이 외곽 20km 밖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거절했고, 계속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이 시점에서도 일본은 상하이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은 2월 중순 육군 9보병사단과 24혼성여단을 추가로 투입하고, 전함 9척을 증원했다. 장제스도 이에 맞서 19로군 외에 실체는 의심스럽더라도 정예군이라고 장제스가 아끼던 87사와 88사를 주축으로 한 5군을 추가 투입했다. 이 부대들은 독일제 장비로 무장하고, 독일식 훈련을 받은 부대였다.

2월 20일, 일본군 항공기들이 상하이를 무차별 폭격하기 시작했다. 중국군 방어선은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중국군은 일본군처럼 항공 및 화력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2월 29일, 일본은 11보병사단을 추가 투입했다. 11사단은 중국군 방어선 후방에 투입되었다. 3월 1일 중국군은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3월 2일 19로군은 보급 및 병력 부족으로 철수하겠다는 전보를 장제스에게 보냈다. 3월 3일, 19로군과 5군은 모두 상하이에서 철수했으며, 중국군이 철수하면서 전투가 끝났다.

3월 4일, 국제 연맹이 양측에 휴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3월 6일, 일본은 결의안을 거부했지만, 중국은 결의안에 동의했다. 3월 14일 국제연맹 대표가 상하이를 방문하여 일본에 휴전 협상에 응할 것을 강요했다. 양국간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양국 군대는 상하이 외곽에서 종종 소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5월 5일, 중국과 일본은 상하이 정전 협정을 맺었다. 양측은 상하이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고, 중국은 군대를 철수시키고 소규모 경찰력만 배치하기로 했다. 일본은 도시에 군대를 주둔시키기로 했다. 많은 중국인들은 이 협정을 굴욕으로 받아들였다. 상하이 사변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상하이 전투가 끝난 지 한 달 뒤인 4월 29일, 일본은 상하이 훙코우 공원에서 주둔군 사령관을 비롯한 지휘부와 상하이 거주민들이 모여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 전투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때 단상을 향해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투척했고, 상하이 전투를 지휘한 일본군 요시노리 시라카와 대장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외에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제3함대 사령장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상하이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등도 부상을 입었다. 요시노리 시라카와(白川 義則)는 부상이 악화되어 5월 26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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