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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2월 19일], 1978년 이집트 특수부대와 키프로스군 사이 전투: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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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2월 19일], 1978년 이집트 특수부대와 키프로스군 사이 전투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2/19 [00:17]

<오늘의 역사> [2월 19일], 1978년 이집트 특수부대와 키프로스군 사이 전투

김종현 | 입력 : 2010/02/19 [00:17]

1978년 2월 19일, 키프로스 라나카(Lanaca) 소재 라나카 국제 공항(Lanaca Internation Airport)에서 납치당한 이집트 인질들을 구출하려던 이집트 육군 특수부대 777부대와 키프로스 군 및 경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로 이집트군 특수부대원 12명과 이집트군이 타고온 C-130 항공기 승무원 3명이 전사하고, 15명 이상의 대원이 부상을 입었다. 정작 납치범들은 키프로스군에 투항했다. 인질 사태를 해결하려던 이집트군과 키프로스군 및 경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 것은 모두 이집트 측의 잘못이다.

사건은 당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의 절친한 친구였던 작가이며 알하람 데일리 신문의 편집장 유세프 세바이(Youssef Sebai)를 팔레스타인 암살범이 니코시아의 키프러스 힐튼 호텔 로비에서 암살하면서 시작되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이후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 관계를 모색하고, 친미 정책으로 전환하자 PLO를 필두로 한 팔레스타인인들이 반발하면서 일으킨 사건이다. 암살범들은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PFLP) 소속이다.

유세프 세바이를 암살한 팔레스타인 암살범들은 호텔에서 11명을 인질로 삼았고, 키프로스 당국을 윽박질러 DC-9 여객기 한 대를 뜯어냈다. 물론 키프로스를 떠나는 조건이었다. 비행기 승무원 4명도 사실상 인질이 되어 총 인질은 17명이 되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나 시리아 같은 인접 아랍국들도 착륙을 허가하지 않았고 결국 비행기 납치범으로 바뀐 암살범 2명과 인질 17명은 키프로스로 되돌아갔다. 키프로스로 돌아온 암살범들과 키프로스 당국은 이때부터 협상을 시작했는데, 여기에 불쑥 이집트 특수부대 777부대가 들이닥친 것이다.

이집트 육군 특수부대 777부대는 대테러임무부대로 1977년에 창설된 부대다.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과 소련군 군사고문단의 철수로 테러 가능성이 늘어나자 사다트 대통령의 지시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대테러 특수임무부대는 창설 후 수년 간 훈련을 거쳐야 쓸만한 전력이 되는 것이 통상이며, 기존 고참 대원들도 훈련을 계속 해야 기량을 유지할 수 있다. 특히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실전 가능성이 낮은 국가일수록 훈련의 중요성은 커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대테러 특수부대란 조직이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 이후 주로 미국 및 서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부대 단위 경험, 역량, 장비 등에서 걸음마 단계였다. 이런 상황에서 창설한 지 1년도 안된 이집트 특수부대가 1976년 이스라엘군이 저지른 엔테베 작전 못지 않은 성과를 내겠다고 덤벼든 것부터 무리였다. 777부대 투입 명령은 사다트 대통령이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키프로스 정부와 이집트 정부가 사전에 777부대 투입과 관련해서 아무런 협의를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사다트 대통령이 절친한 친구를 암살한 암살범들을 이집트로 넘겨달라고 간청하여 당시 키프로스 대통령 스피로스 키프리아노(Spyros Kyprianou)가 반드시 사태를 해결하고 범인들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라나카 국제 공항에 이집트 777부대 58명(74명이라는 자료도 있다)을 태운 C-130이 착륙하자 암살범들이 탄 DC-9을 포위하고 있던 키프로스군은 이들을 적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전에 이집트군과 협력하여 구출 작전을 벌인다는 협의를 했으면 적어도 이집트군과 키프로스군이 교전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C-130은 착륙하자 지프 1대를 내려놓았고, 이 지프는 DC-9 여객기로 접근했다. 다른 대원들은 도보로 이동했다. 키프로스군은 C-130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이집트군이 거부하자 키프로스군은 RPG-7을 지프에 발사했다. 이후 양측 간에 서로 300m도 안되는 거리에서 교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AK-47의 경우 유효 사거리가 300m ~ 400m이고, AK-74는 600m 정도다. 이집트군이 타고온 C-130도 106mm 공격을 받고 격파되었고, 승무원 3명도 전사했다. 키프리아노 키프로스 대통령은 관제탑에서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고 있었지만, 이집트군이 관제탑도 쏘는 바람에 경호원들에게 강제로 안전한 곳으로 끌려나갔다.

한편, 납치한 비행기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암살범들은 키프로스군에 투항했다. 이들은 이집트 측에 넘겨졌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나중에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살아남은 이집트 특수부대원은 모두 이집트로 송환되었고, 이집트와 키프로스는 1981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될때까지 관계는 아주 좋지 않았다.

이 사건은 제대로 사전 협의와 준비도 없이 달려들면 어떻게 되는 지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여담으로, 777부대는 1985년 자국의 보잉 B-777 여객기 납치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진압과정에서 인질 절반을 사살하는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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