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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5월 2일] 1885년, 콩고 자유국 수립: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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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5월 2일] 1885년, 콩고 자유국 수립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5/02 [00:22]

<오늘의 역사> [5월 2일] 1885년, 콩고 자유국 수립

김종현 | 입력 : 2010/05/02 [00:22]

1885년 5월 2일,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아프리카 중부에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을 세웠다. 벨기에와 상관없는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영토인 독립국으로 세웠지만, 결국 벨기에의 식민지에 불과했으며, 원주민들에 대한 가혹 행위가 국제 문제로 비화되자 결국 1908년 11월 15일 벨기에에 병합되어 벨기에령 콩고가 되어 소멸했다. 벨기에령 콩고는 1960년에 콩고 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한다.

벨기에 왕 레 오폴드 2세(Leopold II)는 1865년 12월 17일에 벨기에 국왕에 즉위했다. 그러나 벨기에 영토가 좁은 것이 불만이었던 레오폴드 2세는 해외 식민지 확보를 적극 모색했다. 이 무렵 아프리카는 유럽 제국들이 치열하게 영토 경쟁을 벌이던 지역이었는데, 아프리카 중부 콩고 강 유역 일대를 차지한 유럽 국가는 없었다. 레오폴드는 이 땅에 눈독을 들였다. 벨기에 땅의 75배나 되는 넓은 땅인 콩고에는 고무, 다이아몬드, 금, 은, 구리 등 지하자원이 풍부했지만, 여전히 무주공산이었던 것이다. 레오폴드 2세는 1876년 브뤼셀에서 지질학 컨퍼런스를 개최하면서 레오폴드2세의 "작업"은 본격 행도에 들어갔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식민지화를 추진할 전담 조직으로 국제아프리카협회(International African Association, IAA))를[각주:1] 세웠다. 그러나 결국 이 조직은 콩고에 문명의 헤택을 주기 위한 인도주의 단체로 포장했다. 실제로 1874년부터 1877년까지 이 지역을 탐험한 저널리스트이자 탐험가인 헨리 모튼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는 이 아프리카 협회를 통해 레오폴드2세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스탠리는 레오폴드2세를 위해 열심히 협력했다.

1879년부터 1882년까지 스탠리는 레오폴드2세의 후원을 받아 상콩고 지방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고 지역 부족 통치자들과 협정을 맺었다. 1884년에 이르러 국제 아프리카 협회는 이 지역 450개 독립부족과 조약을 맺었다. 카탕카(Katanga) 에서 레오폴드 밑에서 일했던 프랑스인 크 리스티앙 드 봉샴프(Christian de Bonchamps)는 "조약은 4장의 긴 종이에 작성했고, 아프리카의 부족장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썼다"고 얘기했다. 한마디로 사기쳤다는 것이다. 협회는 이 조약을 기반으로 이 지역을 하나의 영토로 묶어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다른 유럽 국가들도 콩고에 눈독을 들였다. 1880년대 초반, 레오폴드2세가 비밀리에 식민지화를 추진하고 있을 무렵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이 각기 이 지역을 탐내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1884년 11월 15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회의는 이 콩고 문제를 비롯한 아프리카 땅의 분할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참가국들은 다른 나라가 너무 큰 땅을 차지하지 않게하면서 각자 케이크를 확보하고자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다. 협회 설립후 레오폴드 2세는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마치 인도주의 단체인마냥 위장했었다. 콩고에 법과 질서, 그리고 문명의 혜택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속았고, 레오폴드2세를 인도주주의의 화신쯤으로 영웅처럼 대했다. 몇 년간 쌓아온 이미지를 이용하여 드디어 레오폴드 2세는 1885년 2월 25일, 콩고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국제회의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이 회의에서 레오폴드2세는 콩고 자유국의 국왕(King-Sovereign of the Congo Free State)라는 칭호를 획득했다.

이 베를린 회의의 결과로, 1885년 5월 2일, 콩고 자유국이 수립된 것이다. 이제 레오폴드는 자유롭게 군대를 보내 "자신의 영토"에서 반항하는 원주민 국가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콩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외부에서 보기에 콩고 자유국의 발전은 눈부신 것이었다. 1893년 콩고 자유국의 고무 수출량은 250톤이었다. 8년 뒤인, 1901년에는 6000톤으로 증가했다.30배 가까이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내륙에까지 유럽식 철도가 부설되어 교통 여건 또한 개선되었다. 이처럼 콩고 자유국은 건국 이래 눈부신 발전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콩고 원주민들의 실상은 매우 달랐다.

벨기에인들은 고무 농장에 강제 동원된 원주민들이 하루 생산량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질을 하거나 고문을 했으며, 심지어 가족을 죽이기까지 했다. 조그만 잘못에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손목을 잘랐다. 감시병들은 강제 노역 중인 남자들의 부인을 강간하기도 했다. 각종 학살, 고문, 테러의 소식이 콩고 밖으로 새어나갔으며 점차 유럽 각국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 유럽의 신문들에 실렸다. 영국 정부는 계속 접수되는 잔학 행위에 대한 소문을 확인하고자 1903년 로저 캐즈먼트(Roger Casement)를 파견했다. 캐즈먼트는 6개월 간 조사하여 잔학 행위의 생생한 증거와 사레들을 정부에 보고했다. 모든 소문이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되기도 했지만, 잔혹한 폭정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콩고 자유국의 아프리카인들의 인구는 처음 설립될 당시 3,000만명으로 추산되었으나 20세기로 넘어오면서 900만명으로 감소했다. 이것이 레오폴드2세가 표방했던 "인도주의"의 실체였다. 비난이 레오폴드2세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레오폴드2세는 이 모든 일을 엉뚱하게 영국의 음모로 돌렸다. 로저 캐즈먼트가 진상 조사를 위해 왔을때 그의 의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의 잔학 행위에 대한 증거는 넘쳐 흘렀다. 캐즈먼트는 6개월 머물렀을 뿐이지만, 그 이상 있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증거와 사레는 넘쳐 흘렀다. 결국 그때까지 콩고 자유국 문제에 관여하고 있지 않았던 벨기에 정부와 의회가 나섰다. 그들의 해결책은 콩고 자유국을 정식으로 벨기에령 콩고로 만들어 벨기에 정부 책임하에 두는 것이었다. 레오폴드2세는 자신의 재산을 뺐긴다는 생각에 그 방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믿었던 미국마저 레오폴드2세의 잔학 행위에 격분하여 등을 돌리자 레오폴드2세는 자신 곁에 있을 사람이라고는 정부인 블란차 들라크루와(Blanche Zelia Josephine Delacroix) 뿐이었다. 1908년 10월 18일, 레오폴드 2세는 어쩔 수 없이 콩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되었다. 1908년 11월 15일, 벨기에 수상 파 울 스메 데 나에야르(Paul de Smet de Naeyer)는 정식으로 콩고 자유국을 벨기에령 콩고로 합병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콩고 자유국은 소멸하고 벨기에 식민지인 벨기에령 콩고가 성립되었다.

이후 1960년에 벨기에령 콩고는 벨기에로부터 콩고 공화국으로 독립했지만, 여느 아프리카 국가들이 겪었던 것처럼 쿠데타와 내전을 겪어야 했다. 1960년부터 65년까지는 콩고 공화국(Republic of the Congo)이었으나 1965년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의 쿠데타가 벌어졌으며, 1970년에는 자이레(Zaier)로 국명을 바꾸었다. 1996년 ~ 1997년까지 1차 내전 결과 로랑 데질레 카빌라(Laurent-Desire Kabila)가 모부투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후 국명을 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으로 바꾸었다. 현재 대통령 조제 프 카빌라(Joseph Kabila)는 로랑 데질레 카빌라의 아들이다. 1998년부 터 2003년까지 2차 내전을 치른 바 있으며, 아직 안정된 국가라고 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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