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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5월 3일], 1945년 여객선 카프 아르코나가 영국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수천명이 사망하다.: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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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5월 3일], 1945년 여객선 카프 아르코나가 영국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수천명이 사망하다.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5/03 [00:16]

<오늘의 역사> [5월 3일], 1945년 여객선 카프 아르코나가 영국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수천명이 사망하다.

김종현 | 입력 : 2010/05/03 [00:16]

1945년 5월 3일, 독일 북부 뤼벡 만에서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 수천명을 태운 독일의 카프 아르코나 호(CAP Arcona)가 영국 공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영국 공군은 이 배가 SS 수천명을 태우고 노르웨이로 도망가려던 배로 잘못 알았다. 사망자는 5천명이 넘었으며 역사상 2번째 선박 사고였다.

Cap Arcona는 본래 독일과 남아메리카를 오가는 대형 여객선으로 1927년에 독일-남아메리카 항로에 취역했다. 처녀항해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한 타이타닉보다 작지만, 동급의 배라고 생각하면 된다.[각주:1]. 카프 아르코나란 이름은 독일 북부 메 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Mecklenburg-Vorpommern)의 뤼겐 섬(Ruegen Island)에 있는 한 곶의 이름을 딴 것이다. 취역 후, 당대 가장 아름다운 배라는 칭송을 들으며 여객선으로 삶을 누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인 1940년, 독일 해군(Kriegsmarine) 은 이 배를 징발하여 발틱해에서 숙박시설로 사용했다. 1942년에는 독일에서 타 이타닉 호를 소재로 만든 영화에서 타이타닉의 대역을 맡기도 했다(아무리 선전용 영화라지만, 전쟁 중에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역시 괴벨스다). 1945년 독일 해군은 이 배를 다시 바다에 띄어 동프로이센에서 소련군을 피해 도망치는 민간인과 군대를 독일 서부로 수송하는 데 사용했다. 4월말, 이 배는 다시 용도를 바꾸어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죄수들을 수용하는 해상 수용소가 되었다. 이 임무에는 카프 아르코나 외에 도이칠란트와 틸베크(Thielbek)도 투입되었다. 배를 죄수 수송소로 사용하라는 명령은 함부르크 지구장(Gauleiter) 칼 카우프만(Karl Kaufmann,)이 베를린의 명령을 받아 내린 것이었다. 사건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5월 2일, 영국 2군 예하 11기갑사단이 뤼벡을 무혈 점령했다. 사단장 조지 P.B. 로버츠(George Philip Bradley Roberts ) 소장은 점령 후에 국제 적십자사로부터 뤼벡 만에 떠 있는 3척의 배에 죄수 7,000 ~ 8,000명이 탑승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정보가 정확하게 전달되었다면, 사고는 없을 지도 모른다.

히틀러가 자살한 지 4일 뒤이며, 독일이 항복하기 5일 전인 5월 3일, 영국 공군 2전술공군 83전투기전 대 소속 호커 타이푼 전투기들이 3척의 여객선을 공격했다. 공격에 나선 전투기 대대는 184전투비행대대(No. 184 Squadron), 193전투비행대대(No. 193 Squadron), 263전투비행대대(No. 263 Squadron), 197전투비행대대(No. 197 Squadron), 198전투비행대대(No. 198 Squadron)대대였다. 영국 공군은 이 배들이 SS대원들을 아직 독일이 통제하고 있던 노르웨이로 도피시키려는 것으로 알고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배에 SS대원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강제 수용소 수인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간수들이었다. 영국군은 5월 2일에 조지 로버츠 11기갑사단장이 입수한 정보를 전달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죄수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으며, 국적은 28개국에 달했다. 미국, 밸라루스, 벨기에,캐나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네덜란드, 에스토니아, 핀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스, 헝가리, 이탈리아, 라틔아,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스페인, 스위스, 우크라이나, 유고슬라비아 및 기타였다. 미국이나 캐나다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전쟁 발발 후 독일에 머물러 있다가 체포되었거나, 전투 중 포로로 잡힌 사람들 같다.

83전투기 전대의 타이푼 공격기들은 60발의 RP-3 로켓탄과 폭탄, 20mm 기관포로 3척의 배를 공격했다. 곧 이 배들은 불길에 휩싸여 차레로 침몰했다. 공격 직후, 생존자들을 구출하러 카프 아르코나 호에 접근한 독일 어선들은 선원 16명, SS남자대원 400명, 여성 대원 20명을 구출했다. 수인 대부분은 배와 함께 북해의 바다 밑에 수장되었다. 카프 아르코나에 갇혀 있던 죄수 4,500명 중 350명만이 살아남았다. 3척을 합치면 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타이타닉 호의 희생자 1,517명의 3배가 넘는 희생자 수다. 193대대 조종사였던 알란 와이즈(Allan Wyse)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We used our cannon fire at the chaps in the water . . . we shot them up with 20mm cannons in the water. Horrible thing, but we were told to do it and we did it. That's war.

    우리는 기관포로 물에 뛰어든 사람도 공격했다. 끔찍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받았고, 그렇게 했다. 그건 전쟁이었다.

공격직후, 미국 육군항공대 161전술정찰대대 소속 정찰기가 공격 직후에 차가운 북해에서 살겠다는 일념으로 해안으로 수영하고 있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물론 시체가 더 많았다. 시체들이 조류때문에 해변으로 밀려들자, 인근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한군데 매장했다. 5월 4일, 영국 공군의 정찰기들이 난파된 틸베크와 카프 아르코나를 잔해를 사진 촬영했다. 카프 아르코나의 잔해는 나중에 해안으로 끌어올려져 1949년에 해체되었다. 5월 2일에 11기갑사단이 입수한 정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제때에 같은 지역에서 작전 전개 중인 영국 공군에 전달되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편, 수인 생존자 중 1명인 에르빈 게쇼네크(Erwin Geschonneck)는 나중에 배우가 되었고, 1982년에 카프 아르코나를 소재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으며, 집단 매장지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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