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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6월 4일] 1958년, 드골, 알제리에서 ”나는 이해했습니다”라고 연설.: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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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6월 4일] 1958년, 드골, 알제리에서 ”나는 이해했습니다”라고 연설.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6/04 [04:23]

<오늘의 역사> [6월 4일] 1958년, 드골, 알제리에서 ”나는 이해했습니다”라고 연설.

김종현 | 입력 : 2010/06/04 [04:23]

1958년 6월 4일, 알제리를 방문한 드골은 군중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 “나는 여러분들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인 6월 6일, 모스타가넹에서 이렇게 외쳤다 : “알제리 프랑스 만세!” 1958년 10월, 그는 콩스탕틴에서 울부짖었다 : “알제리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 드골은 알제리의 독립을 승인할 계획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는 전쟁 후 복구, 나치 부역자 숙청, 식민지들의 독립 투쟁, 그리고 정치 불안정으로 혼란스러웠다. 1946년 10월 13일 제4공화정을 수립한 프랑스인들은 이후 1958년까지 12년 동안 내각이 20번이나 바뀌는 정치 불안을 겪어야 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전후 경제 복구에서 불거진 문제와 인플레 및 재정 적자에 따른 프랑스 경제 불안, 군비 문제, 식민지들의 잇달은 독립, 서서히 격화되는 냉전 등에 대해 당시 프랑스 정치권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특히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보 구엔 지압의 베트민군에 박살나고[각주:1], 1954년 알제리의 독립주의자들이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FLN)을 창설하고 독립 투쟁에 나서면서 프랑스 정국은 한층 어지러워졌다. 이미 베트남과 프랑스의 관계는 끝난 상황이었지만, 알제리는 달랐다.

130여년간 알제리를 통치해온 프랑스는 알제리 독립을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우파의 생각을 잘 압축한 구호가 바로 "알제리 프랑스"다. 알제리인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우파는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닌 파리나 알자스-로렌 같은 프랑스 본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프랑스 우파의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던 알제리인들의 투쟁은 안그래도 어려운 프랑스 경제를 심각한 상황으로 몰고 갔으며, 알제리 문제를 둘러싼 프랑스의 내분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격화되었다.

1958년 5월, 내각이 또 다시 붕괴하고 르네 코티(Rene Coty) 대통령이 인민공화운동의 지도자 삐에르 쁠랭랭(Pierre Pflimlin)에 조각을 요청하자, 5월 13일, 알제리 주둔군이 반란을 일으켜 공안위원회를 구성하며 알제리의 권력을 장악했다. 쁠랭랭이 예전에 FNL과 협상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알제리 주둔군과 극우 민간인들은 쁠랭랭을 불신하고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다. 반란군은 5월 24일에 코르시카를 점령했고, 파리에 공수부대를 낙하시켜 반란 가담 가능성이 있는 군부대와 결탁하여 정부를 전복할 게획을 세우기도 했다. 군부 반란과 내전 위기에 처한 르네 코티 대통령은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2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군사 독재 아니면 드골(Charles de Gaulle)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군대도 드골 지지자들이었다. 5월 27일 드골은 자신이 내각을 꾸릴 의사가 있음을 공개했다. 쿠데타 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사를 하지 않았다. 결국 코티 대통령은 드골을 선택했다.

6월 1일, 드골은 의회에 출석했고, 6개월 간 비상 권한을 부여받았다. 1946년 1월 20일에 군비 예산 문제로 장관들과 의견 차이를 본 이후 정당제도 복귀 시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정부 수반에서 물러났던 드골이 국내 위기를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정가에 복귀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알제리로 날아갔다. 그리고 6월 4일, 군중들 앞에서 ”나는 여러분들을 이해했습니다 Je vous ai compris.”라고 외친 것이다.

알제리 위기를 수습하는 방안은 알제리를 독립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 드골이었지만, 당시 이 말을 그런 의미로 해석한 사람은 없었다. 반란군은 드골이 자신들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해준 것이라고 해석하고 총칼을 거두었다. 그러나 드골의 이 발언은 알제리의 상황을 이해했고, 알제리를 독립시키겠다는 암시였다. 뒤늦게 드골의 진짜 뜻을 알게 된 극우파 세력은 드골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치를 떨었다. 극우파는 1961년 4월 21일에 드골을 상대로 알제리에서 2번째 쿠데타를 일으키도 하고, 같은 해 8월 22일에는 드골을 암살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태는 드골의 뜻대로 수습되었다.

1962년 7월 3일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했고, 알제리의 프랑스 세력은 본토로 축출되었다. 이들의 후신이 현재 프랑스 극우파 국민전선(Front national, FN)이며, 극우파 국민전선의 영수였던 장 마리 르펜(Jean-Marie Le Pen)은 알제리 주둔군 정보 장교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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