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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8월 27일] 1962년, 새나라자동차 조립 공장 완공: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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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8월 27일] 1962년, 새나라자동차 조립 공장 완공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8/27 [06:42]

<오늘의 역사> [8월 27일] 1962년, 새나라자동차 조립 공장 완공

김종현 | 입력 : 2010/08/27 [06:42]

1962년 8월 27일, GM대우의 전신인 새나라자동차 공장이 부평에 완공되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일본 닛산의 블루버드를 세미 녹다운(Semi Knock Down) 방식으로 도입하여 1962년부터 1963년까지 2,773대를 "조립"했다. 그러나 새나라자동차는 한국 자동차 공업에 기여한 바도 없을 뿐더러, 박정희 군사 정권의 4대 의혹 사건의 하나로 지목되어 무성한 말만 남겼다.

한국의 최초 자동차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수입한 포드 자동차 회사의 모델A다. 이후 일제 강점기 기간 중에 일본으로부터 각종 화물 트럭, 버스, 승용차를 수입하여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했다. 최초의 국산 자동차 시발 자동차의 공장장을 지냈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상공부에서 테크노크라트로 일하며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 개발을 주도했던 오원철 전 경제 수석에 따르면 1945년 당시 국내 등록 자동차 수는 모든 차종을 합해 7,386대였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차량 중 트럭 위주로 불하하면서 자동차 등록대수도 늘었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터지자 국내 자동차 수리 및 조립업체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폐차를 재생하여 차를 만들어냈는데, 여기서 전설같은 일이 벌어진다. 천막 쳐놓고 망치로 두들겨 버스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업체 중에 하나가 유명한 시-발 자동차였다. 그래도 시발 자동차는 고생 끝에 엔진까지 만들어 탑재한 차로 국산화 율도 높은 편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전국에서 이런 수공업 기반의 자동차 조립업체가 난립했다. 오원철 전 경제 수석에 따르면, 이런 조립업체가 1961년에 150여개에 달했다. 당시 버스와 화물차 생산량은 1962년부터 1969년까지 8년동안 11,128대를 만들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엄청난 격세 지감이다. 어쩄든 자동차 생산량은 얼마 안되는데 100개가 넘는 조립업체들이 난립하는 상화을 정리하겠다며 나온 군사정권에서 내놓은 방안이 자동차 공업 일원화 정책이었다. 그리고 상공부는 미비한 수준의 국내 자동차 부품 업체를 키워서 자동차의 국산화를 도모하려고 했다. 자동차 공업은 기계 공업의 꽃이니 자동차 부품의 국산화를 통해 기계 공업을 발전을 기대했을 것이다. 의도는 좋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 핵심이 새나라자동차다.

애시당초 새나라자동차는 자동차 공업 일원화 정책과는 무관하게 탄생했다. 이 과정에 대해서 오원철 전 경제수석은 "상공부의 허가도 없이 갑자기 새나라자동차(주)가 생겨났다"라는 말만 하고 있다. 새나라자동차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있던 김종필의 작품이다. 새나라자동차(주) 설립 과정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것이다. 겉으로는 재일교포 박노정이란 사람이 이 회사를 세웠다. 그러나 1961년 10월에 대만을 방문하여 대만의 자동차 업계를 둘러본 김종필이 그 해 12월에 재일동포 박노정을 만나면서 새나라자동차 설립을 추진했던 것이다.

새나라자동차는 1962년 1월 29일에 정식으로 법인 등기를 마쳤다. 새나라자동차는 공장을 세우기도 전에 관광용이란 명목으로 닛산으로부터 블루버드[각주:4] P310형 400대를 도입했다. 이 400대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수입하여 면세 해택을 받았다. 그런데 수입 후 새나라자동차는 중앙정보부란 든든한 빽을 믿고 멋대로 일반 택시로 바꾸어 팔아치웠다. 당시 상공부에서 근무하며 국내 경제 발전사를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소상하게 쓰고 있는 오원철 전 경제수석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회사는 그만큼 최소한 면세된 세금만큼의 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공장 부지와 관련하여 상공부에 인천시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세운 공장이 지금 GM대우의 부평공장이다. 그러나 "공장"이라고 해봐야 별반 시설도 없었다. 문제는 닛산의 블루버드를 세미 녹다운(Semi Knock down, SKD)방식으로 도입했다는 점이다. 이 방식은 완제품을 일부 분해하여 수입하는 것이다. SKD로 수입할 경우, 자동차는 엔진을 미션까지 부착시킨 상태로 통째로 수입하고, 차축이나 조향장치, 차체 정도만 분해해서 수입한다는 것이다. 차체에는 유리까지 끼워놓은 채이다. 그러니 수입하는 쪽에서는 용접기와 볼트를 조일 도구만 있으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독일 공장에서 다 만들었던 벤츠 S600을 일부만 분해하여 수입해서 동네 공업사에서 조립하여 판매하는 꼴이다. 오원철 전 경제수석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비판하고 있다. 새나라자동차는 우리나라 자동차 공업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었다고. 새나라자동차는 모든 부품을 통째로 들여와 단지 조립만 한 회사였다. 게다가 국내 부품을 전혀 사용하는 것도 없이 반제품을 들여와 조립만 하다보니 모든 부품을 개별로 포장해야 해서 수입 비용은 더 들었다. 당연히 완성차 수입보다 SKD 수입차가 외화가 더 낭비되는 것이다.

새나라자동차가 군사정권의 4대 의혹 사건에 포함된 것은 이떄문만은 아니었다. 1962년에 제정한 자동차공업보호법에 의거하여 각종 면세 해택을 받았다. 공장 시설에 필요한 자재부터 SKD로 수입하는 자동차 부품도 모두 관세를 면제받았으며, 심지어 지방세도 면세를 받았다. 구입을 한 사람이 자동차 취득세를 물지 않도록 허용한 것이다. 그것도 새나라자동차에 한해서 부여된 특혜였다. 이런 특혜때문에 여론이 들끓었고, 최초의 국산 자동차를 제작한 시발 자동차 회사는 새나라자동차때문에 문을 닫아야 했다.

또 다른 병폐로는 상공부가 애초 의도했던 국산화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었다는 점이다. 애시당초 모든 부품을 반조립 상태로 들여오는 SKD인데다가 자동차공업보호법에 다라 수입 부품에 대해서도 관세를 면제받으니 새나라자동차 입장에서는 국산 부품을 구입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고, 자연히 국내 부품업체와 거래할 일도 없었다. 이는 나중에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하여 "코로나"[각주:5]라 는 자동차를 만든 신진 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부품 국산화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국산 부품의 품질문제도 있겠지만, 일본에서 수입하는 게 더 쌌던 것이다. 오원철 전 경제수석은 1967년에 자동차공업보호법이 폐지될때까지 자동차 공업은 불모지가 되버렸다고 개탄했다[각주:6]. 자동차 공업보호법은 이름과 달리 보호하기는 커녕 그나마 자생하던 국산 자동차 공업을 마비시키고 일본 자동차에 국내 시장을 넘겨주는 역할 밖에 하지 않았던 셈이다. 물론 당시 자동차 공업이 설계도도 없이 적당히 대충 망치로 두들겨 만들다보니 안전성이 위험하여 제대로 자동차 공업을 육성하자는 취지로 만든 법이기는 했다. 자동차 공업 일원화 정책도, 자동차공업보호법도 의도는 좋았으나, 시행 과정과 결과는 좋지 않았던 것이다.

군사정권의 4대 의혹으로 발전한 새나라자동차는 1963년 7월에 외화가 바닥나서 더 이상 닛산의 블루버드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문을 닫았다. 이 회사는 1965년 신진자동차로 공장과 모든 권리가 넘어갔고 이후 다시 대우가 신진자동차를 인수하게 된다. 시발(욕 아님) 자동차 이후 국산 자동차의 꿈은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등장할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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