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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8월 28일] 1950년, 대한민국 정부 1차 화폐 개혁 단행: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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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8월 28일] 1950년, 대한민국 정부 1차 화폐 개혁 단행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8/28 [06:44]

<오늘의 역사> [8월 28일] 1950년, 대한민국 정부 1차 화폐 개혁 단행

김종현 | 입력 : 2010/08/28 [06:44]


1950년 8월 28일, 이승만 정권은 기존에 사용하고 있던 조선은행권을 새로 발행한 한국은행권으로 1:1 교환하는 긴급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대통령 긴급명령 제10호 - 조선은행권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이란 명령으로 시행된 이 조치는 순전히 전쟁 탓에 급히 단행된 화폐 개혁이었다.

한국은행은 기존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지 수탈 경제를 주관한 조선은행을 대신하는 중앙은행으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일제 시대에 발행된 조선은행권을 대신하는 새로운 한국은행권 발행을 준비했다. 그런데 문제는 은행 설립 날짜였다. 한국 정부가 한국은행을 설립한 것은 1950년 6월 12일이었다. 전쟁이 터지기 불과 2주전이다. 이제 막 설립하고 새로운 한국은행권을 발행하기도 전에 전쟁이 터져버린 것이다.

6월 27일 오후 2시, 한국은행은 국방부에서 어렵게 지원받은 트럭 1대에 순금 1,070㎏, 은 2,513㎏를 싣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나머지 순금 260㎏과 은 15,970㎏은 옮기지 못했고, 이 금과 은은 모두 북한군이 접수했다. 그리고 또 문제가 한국은행 금고에 잠자고 있던 미발행 조선은행권이었다. 이것 역시 북한군이 접수했는데, 규모가 당시 화폐로 약 40억원이었다. 지금 화폐 가치로 바꾸면 얼마나 될까? 한국은행에서 운영하는 경제교육 관련 사이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1950년 당시 1원이 2007년에 6,221원이라고 한다. 이 기준으로 40억원 x 6,221을 엑셀에서 돌려보니 2.48848E+14라는 결과가 나왔다(.....-_-). 다시 서식을 바꿔보니 248,848,000,000,000가 나왔다. 대충 249조원이다. 3년이 지났으니 더 올랐을 것이다. 2MB 정권이 책정한 2010년 한국 정부의 예산이 291조원이다. 2010년 정부 예산과 맞먹는 화폐가 북한군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6월 28일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으니, 미처 챙기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나마 순금 1,070㎏, 은 2,513㎏이라도 챙겼으니 다행이다[각주:1]

문제는 조선은행권이었다. 중앙은행이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가 통화 신용 정책의 수립이며, 화폐 발행은 그 정책 중 가장 중요한 업무다. 화폐를 지나치게 발행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나라 경제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각주:2]. 따라서 적절하게 시중에서 화폐가 유통되도록 중앙은행은 항상 통제하고 있다. 조선은행권 40억원이 금고에서 잠자고 있던 이유도 아마 그때문이었을 것이다.

화폐의 과다 유통은 이런 점때문에 유용한 무기가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 독일의 SS가 유태인을 동원하여 달러와 파운드 위조 지폐를 대량으로 찍어낸 것도 영국과 미국 경제를 교란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서울 시민을 나몰라라 내팽겨치듯이 버리고 부산으로 피란가기는 했으나 한국 정부도 그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군이 조폐창도 점령했기 떄문에 어쩔 수 없이 새 화폐를 일본에서 인쇄했다. 7월 13일에 1천원권 60억원을 실은 군 수송기가 김해 공항에 처음으로 도착했다. 그런데 이미 북한은 점령 지역에서 북한 인민권을 강제 유통시키면서 동시에 서울에서 약탈한 조선은행 천원권과 백원권을 마구잡이로 뿌렸다. 심지어 낙동강 방위선 안쪽까지 침투하여 약탈한 은행권을 뿌려서 지역 경제를 교란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날 한국은행권과 조선은행권을 1:1로 바꾸는 화폐 개혁을 단행하게 된 것이다.

실제 화폐 교환은 9월 1일부터 실시했으며, 전선 변화에 따라 크게 4차로 나누어 실행했다. 1차는 9월 1일부터 9월 22일까지 워커라인(포항-영천-대구-창녕-마산-통영을 연결하는 전선) 이내에서 실시했다. 교환 마감 후에는 조선은행권 100원권의 사용을 금지했다. 2차는 서울, 경기, 강원 지역에서 실시했고, 3차는 1950년 11월 11일부터 11월 18일까지 남은 남한 전역에서 실시했다. 4차 교환은 1950년 11월 18일부터 1951년 4월 30일까지 그동한 못했던 지역에서 실시했다. 마지막은 1951년 9월 24일부터 재무부 고시 45호에 의거하여 실시하였는데, 1953년 1월 16일에야 종료되었다.

1차 화폐 개혁은 경제나 통화 정책 상 필요에 의해서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통화 정책과 무관하게 군사 작전 관점에서 불가피하게 실행한 측면이 크다. 그리고 이 1차 화폐 개혁으로 한국은행이 수십년 동안 발권은행이었던 조선은행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새로운 중앙은행이자 발권은행(화폐를 발행하는 은행)으로서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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