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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 [3월 3일] 1845년, <집합론>을 창시한 독일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 출생: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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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 [3월 3일] 1845년, <집합론>을 창시한 독일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 출생

김종현 | 기사입력 2009/03/03 [09:10]

<오늘의 역사 > [3월 3일] 1845년, <집합론>을 창시한 독일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 출생

김종현 | 입력 : 2009/03/03 [09:10]
 1845년 3월 3일, <집합론>을 창시했지만,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쓸쓸하게 사망한 독일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Georg Ferdinand Ludwing Philipp Cantor)가 태어났다.

인류 역사에서 기존의 통념이나 진리로 믿어지던 것들을 깨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숱한 고초를 겪거나 인정을 받지 못해 가난 속에 죽고는 했다. 칸토어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1874년 칸토어는 집합론에 관한 새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칸토어는 모든 대수적 수의 집합에 관련된 아무도 예상못한 역설적인 결과를 제시했으며, 내용과 방법도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이 논문을 발표했을때 칸토어는 겨우 29살이었다. 그러나 칸토어는 이 논문 발표때문에 수많은 학문상의 적들을 만들게 되었다. 그 적들 중에는 그의 스승도 있었다. 결국 남은 인생 동안 학문적인 적들과 싸움을 이겨내지 못한 칸토어는 말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던 것이다.
 
칸토어가 공격을 당한 이유는 그때까지 수학계에서 금기였던 "무한(∞)"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수학자들은 무한이라는 존재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오류가 발생했기 때문에 일부러 피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29살의 칸토어는 무한을 분류하고, 무한끼리 셈을 하기도 했다. 칸토어가 이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증명 방법, 즉 "대각선 증명"은 칸토어 자신도 처음에는 그 결과를 믿지 못하여 3년을 낭비했을 정도였기 때문에 다른 일반 수학자들의 반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칸토어는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끝내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특히 그의 스승이었던 크로네커나 후에 브로워로 대표되는 직관주의 학파와 대립이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논리적, 산술적인 사실을 직접적으로 또는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고 믿은 직관주의 학파는 칸토어의 무한 이론을 문제가 많은 이론이라고 봤던 것이다. 
 
칸토어는 40세가 되는 1884년부터 정신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나마 데디킨트 정도가 칸토어를 옹호하는 덕분에 칸토어는 자신의 이론을 완성해나갔다. 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이 칸토어를 비난하는 와중에 어려서부터 그다지 강인한 성격이 아니고 권위에 쉽게 복종하는 성향이었던 칸토어는 심한 우울증세에 시달렸다. 
 
비록 청년기와 장년기에는 수많은 비난을 참아내야 했고, 우울증과 정신병도 걸렸지만, 말년에 많은 지지자들이 생겼고, 그의 이론을 부정하려 했던 역설들이 오히려 집합론의 가치를 인정하는 역설을 낳았다. 스승이자 적이었던 크로네커와도 크로네커가 죽기 수년 전에 화해했으며 많은 지지자가 생기는 등 청장년기와 달리 노년에는 영예와 칭송이 뒤따랐다. 그의 집합론도 수학계에서 해석학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1918년 1월 6일에 칸토어는 할레의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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