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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9월 2일] 1879년 안중근 태어나다.: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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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9월 2일] 1879년 안중근 태어나다.

김종현 | 기사입력 2008/09/02 [08:29]

<오늘의 역사> [9월 2일] 1879년 안중근 태어나다.

김종현 | 입력 : 2008/09/02 [08:29]
 1879년 9월 2일 일본의 조선 통감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안중근은 조선말에 태어나 일본으로 국권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전사로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 독립을 위해 싸우는 한 국가의 군인으로 스스로 생각했으며, 대한제국이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내법에 따라 "살인죄"로 재판을 받은 것을 항의하기도 했다. 물론 이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였으며 그의 세례명은 "토마스"였다. 안중근을 "도마 안중근"으로 부르는 이유도 세례명이 "토마스"이기 때문이다. 도마는 토마스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재판 후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고해성사와 미사를 위한 사제를 보내줄 것을 청원할 정도로 독실했다. 그의 청원은 받아들여져 황해도 신천본당의 주임신부였던 조제프 빌렘 신부이 뤼순 감옥의 안중근을 방문하여 1910년 3월 9일에 고해성사를, 3월 10일에는 마지막 미사를 집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독립운동에 뛰어든 안중근은 처음에는 학교사업을 벌이다가 1907년 만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1909년 초대 통감(조선총독부의 전신)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의 암살을 추진했다. 안중근은 2자루의 권총을 준비했는데 하나는 6연발 리볼버이고, 다른 하나는 FN사의 M1900 자동권총이었는데, 암살은 FN M1900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권총은 7발 탄창과 약실에 1발을 수동으로 장전하여 총 8발을 연속으로 쏠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된 1914년 사라예보 암살 사건때도 사용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서 내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을때, 안중근이 의장대를 헤치고 그를 처형했고, 곧장 러시아 의장대에 체포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안중근을 일본 정부에 인도하였으며 뤼순 감옥에 갇혔다.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에 처형되었다.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이 안중근의 사형 집행 순간에 참가했다. 옥중에서 안중근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저술하였으나 미완으로 남았고, 그가 남긴 서예는 대한민국 보물 56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시신은 현재도 찾지 못하고 있다.

10월 26일은 1979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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