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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5월 23일] 1985년, 서울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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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5월 23일] 1985년, 서울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5/23 [04:37]

<오늘의 역사> [5월 23일] 1985년, 서울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김종현 | 입력 : 2010/05/23 [04:37]

1985년 5월 23일,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서울 지역 5개 대학 학생 73명이 소공동 소재 미국 문화원 2층 도서관을 기습 점거했다. 이들은 당시 주한 미대사 리처드 워커(Richard L. Walker)와 면담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5.18민주화운동의 무력진압을 미국이 묵인한 데 대해 공개사과하고 한국 군부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1983년 학원자율화조치를 통해 각 대학교 내에 점령군처럼 주둔하고 있던 경찰 부대가 철수하고, 1984년말부터 각 대학교 총학생회들이 다시 등장했다. 1985년 4월 17일에 전국 62개 대학 학생회가 참여하는 전국학생총연합(의장 당시 김민석 서울대총학생회장)이 출범하였고, 그 산하에 전년도의 민주화투쟁학생연합(민투학련)을 계승하는 형태로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이른바 삼민투, 위원장 당시 허인회 고려대 총학생회장)라는 투쟁 기구를 별도로 설치했다. 한편 1985년 2월 12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신민당 바람이 불면서 국민의 반전두환정권 감정 및 민주화 요구가 표면화되었다. 물론 대학생들이 총선에서 신민당을 적극 지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국학생총연합은 5월을 맞아 대규모 투쟁을 기획한다. 전두환 정권의 수립 기반이며 동시에 아킬레스건이었던 광주민주화운동(당시 정권에서는 "광주사태"라 불렀고, 학생운동권은 "광주학살"이라 불렀다. 여기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현재 정착된 표현을 사용하겠다)을 내세워 전두환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주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각 대학별로 학생회 산하에 5월 투쟁을 전담할 비밀결사 형태의 투쟁기구인 "5월 투쟁위원회"를 조직했고, 투쟁 계획은 5월 14일, 5월 17일, 5월 22일, 5월 26일에 4차례 벌이기로 했다. 점거 농성 투쟁일로는 5월 22일을 정했다.

5월 16일, 성균관대 학생회관에서 서울대를 비롯한 4개 대학의 5월투쟁위원장들(서울대 함운경, 고려대 이정훈, 연세대 박선원, 성균관대 고진화) 4명과 5월 22일 선도투쟁을 담당한 실무책임자들(서울대 홍성영, 고려대 신정훈, 연세대 최영군(나중에 박중하로 변경), 성균관대 구자춘) 4명 등 8명이 처음으로 모여 선도 투쟁 방안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서울미문화원 점거를 결정했다. 미문화원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당시 미문화원을 후보로 선택한 것은 미국을 공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을 공격하는 방편에서 충격 및 파급 효과, 치외법권지역으로서 점거 공간이 갖는 안정성 등을 우선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 미국 문화원 건물 안은 대사관처럼 미국 관할이고, 한국 경찰이 함부로 진입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고, 도서관은 일반인도 신분증만 제시하면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고, 공간이 넓어서 농성에도 적합한 곳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를 요구한 것은 전두환 정권의 아킬레스건을 노린 전략이었다.

원래 거사일은 5월 22일이었다. 주모자들은 사전 답사와 집결지, 이동 경로까지 세심하게 사전에 점검했다. 그러나 계획일 당일 하필 근처 롯데호텔에서 한미안보협의회가 열리는 바람에 경찰 경비 병력이 대거 인근에 배치되는 바람에 미 문화원 주변에 학교별로 모였던 학생들은 학교로 황급히 돌아갔다. 처음에는 계획이 사전 탄로난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도서관에 미리 들어가 있던 4학년들이 학교로 돌아와 한미안보협의회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알린 후 23일에 다시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985년에는 휴대폰은 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이다.

5월 23일 낮 12시 5분, 계획한 대로 미 문화원을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5개 지점에 모인 학생들은 일제히 약속한 신호에 맞춰 2층 도서관을 점거했다. 다만 길을 잃고 헤메던 서울대생 6명은 미처 들어가지 못했다. 농성단 대표를 맡기로 했던 함운경이 길을 잃고 헤멘 탓인데 함운경도 자칫 들어가지 못할 번 했다고 한다. 어쨌든 내부에 미리 들어가 있던 2명이 호응하며 학생들은 2층 도서관을 점거하는데 성공했다. 점거 후 도서관 직원들과 일반 열람객들은 모두 내보내고 문을 걸어 잠그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리고 학생들의 연락을 받고 외부에는 신문기자들이 대거 몰려왔다. 미국은 12시 50분에 첫번째 면담을 요청했다. 학생들은 미국 관계자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미국의 책임과 사과를 요구했다. 미국 대사관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반미를 주장하지 않았고, 언론사들에도 필담으로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학생대표였던 함운경은 당시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미국은 우리의 해방에 기여했고 6·25때 참전했으며 그후 굳건한 우방으로 있어왔다. 그러나 5·17 이후 국민들이 미국을 불신하는 현상이 안타깝다. 광주사태에 관해 솔직히 사과하고 우리의 민주회복을 진정으로 도와줄 때 비로소 올바른 한·미관계가 이룩된다”

학생들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한 미국도 굳이 무리하게 진압을 시도하지 않고 대화로 문제를 풀기로 했다.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처럼 인질을 붙잡고 거래를 요구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실 어설프게 도서관 집기로 쌓은 바리케이트를 해체하는 데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농성 학생들도 그에 대한 환상은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미국 덕분에 농성단은 3일 동안 자신들의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학생들도 미국이 사과나 해명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최대한 오래 버티느냐가 더 중요했다. 미국 대사관도 국무성과 협의한 끝에 학생들을 달래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미국과 학생들의 생각이 서로 맞아떨어져 대화를 11번이나 했던 것이다. 아마 미국측도 농성 학생들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지 않았을까 싶다. 굳이 한국 경찰이 진압 작전을 벌여 난장판을 만들게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이리하여 3일 동안 미국과 학생들은 11차레 대화를 이어나갔다. 미국측 대표는 정치담당 참사관 던롭이었다. 던롭이 당시 워커 주한 미 대사 대리 자격으로 온 것이다. 학생들도 굳이 워커 대사와 면담을 고집하지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오래 버티느냐는 것이었고, 던롭 참사관이 대사 대리로 온 것으로도 충분했다. 미국은 부대사를 보내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양자 대화 내용은 그다지 진전이 없었다. 미국은 책임질 일이 없으니 사과할 일도 없다는 입장이고, 학생들은 한국군 20사단의 투입과 학살 행위를 승인한 책임이 있으니 해명하고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미국의 입장은 현재도 달라진 것이 없다.

3일 간 농성을 자진해서 풀은 것은 5월 27일에 남북적십자회담이 맞은 편 롯데호텔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함운경은 만일 북한 대표단이 자신들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자신들을 격려하는 행동을 취하기라도 하면 반북 정서가 지금보다 강했던 그 당시에 3일 간 농성과 대화로 나름 이룬 성과를 모두 망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5월 27일 남북적십자회담도 미국 대사관이 알려준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미국 대사관은 학생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훤히 그들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얘기다. 회담 사실을 알려주면서 "이제는 해산할때도 되지 않았냐"라고 애기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미국 대사관의 협조 아닌 협조 덕분에 치외법권 지역에서 3일간 농성을 벌인 후인 5월 26일 자진하여 농성을 풀고 자신들이 문화원에 진입했던 12시 5분에 문화원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경찰 버스에 올라탔다.

점거농성을 주도한 김민석(2010년 현재 민주당 최고위원) 씨와 함운경(2010년 5월 현재 나주시 시장) 등 25명이 구속됐다. 43명 구류, 5명 훈방으로 풀려났다. 주로 저학년 2~3학년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주로 4학년들이 구속되었다. 구속된 학생들 가운데 16명이 공무집행 방해 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87년, 88년 두 차례 특사로 모두 사면됐다. 현재 이들 대부분은 지금은 사회에서 기업인, 정치인, 변호사 등으로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40~50대가 되었다.

이 사건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개 거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에 있었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도 광주 문제를 제기하며 일으킨 사건이었으나, 방화라는 수단을 사용한 점과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점때문에 광주 문제는 그대로 묻혀버렸던 반면,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은 미국의 협조 아닌 협조 덕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세계의 이목을 끌고 광주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개회 중이던 국회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성격을 둘러싸고 여야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이윽고 6월 7일 윤성민 국방장관이 국방위 답변형식으로 [광주사태전모]를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전학련과 삼민투를 좌경용공으로 매도하여 반공이데올로기를 자극하여 문제 확산을 최소하려고 했다. 미국을 비판하면 곧 친북 좌파라는 논리로 빨갱이 컴플렉스를 자극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학원안정화법을 제정하여 대학 내에 사실상 계엄령을 선포하려는 시도까지 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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