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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5월 17일] 1953년, 향린교회 설립:엔티엠뉴스

<오늘의 역사> [5월 17일] 1953년, 향린교회 설립

2010-05-17     김종현
1953년 5월 17일, 안병무, 이영환, 장하구, 홍창의 등 12명의 평신도들이 남산 기슭 향린원(현재 중국요리집 동보성 자리)에서 평신도 신앙공동체를 세웠다. 개혁 사고를 가진 젊은 신도들은 1) 생활공동체, 2) 입체 선교공동체, 3) 평신도 교회, 4) 독립교회라는 창립 정신을 내걸고 "향기 나는 이웃"(香隣)이 되겠다는 의미로 향린교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현재 을지로 중구 명동성당 맞은 편 골목에 낡고 초라하게 보여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겉모습을 가진 향린교회의 시작이다. 향린교회는 1987년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기인 대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2] 향린교회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의 주교좌성당인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과 더불어 6월 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향린교회 창립을 주도한 안병무, 이영환, 장하구, 홍창의 등은 일제 시대부터 신앙공동회를 만들어 함께 성서를 공부하며 친분 관계를 쌓아온 사이였다. 해방 후, 서울로 온 이들은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를 만들어 신앙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이때부터 기성 교회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고 한다. 그 한 예로 기독학생회 전국연합회가 추진될때 이를 주도한 YMCA가 세속 문화에 젖어 사교와 레크레이션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이유로 안병무와 동료들은 참가를 거부할 정도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이들은 각자의 집을 돌아가면서 성서공부와 기도회, 토론회를 하는 등 자신들 중심의 신앙 생활을 계속 이어나갔다.

1947년, 곽상수, 김동명, 김철현, 백종무, 안병무, 오기형, 이영환, 이종완, 장하구, 한철하, 홍창의 등이 '일신회'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어떻게 보면, 이 모임을 향린교회의 전신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일신회"라는 명칭은 홍창의가 에베소서 4장 4절을 근거로 제안했다. 한글로 "일신"을 쓸 경우, "한 하느님"(一神), "한 믿음"(一信), "한 몸"(一身), "날로 새로워짐"(日新)을 의미하는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두 찬성하여 이 이름에 찬성했다고 한다. 향린교회라는 이름도 그렇지만, 이 일신회라는 이름에서도 탁월한 문장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한국 전쟁 발발로 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안병무 등은 기존 교회에 깊이 실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3년 2월 이후 다시 서울로 모인 이들은 남자 6명, 여자 6명이 남산 기슭 향린원 (지금의 중국요리집 동보성 자리)에서 창립 예배를 드렸다. 당시 창립 교인으로 참여한 홍창의는 향린교회 웹사이트에 당시 자신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밝혔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 한 순간이여,
감격의 눈물 내 앞을 가리우니
말없이 핀 저 꽃의 향기로움이여
우리의 기도소리 저 나라로 옮기소서.

교회 창립자들은 교역자를 따로 두지 않고 교인 모두가 선교에 직접 참여하는 평신도(平信徒)교회로 시작했고, 설교가 아니라 신도 각자의 직업 생활 속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설교는 안병무, 이영환, 장하구, 홍창의가 돌아가면서 했고, 가톨릭의 수도원 형태의 신앙 생활을 추구했다. 향린교회는 교세가 성장하면서 1960년 12월에 남대문 시장 한복판인 남창동으로 옮겼다가 1967년 12월 24일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1974년 10월 김호식 목사를 받아들여 일반 교회로 전환했다. 그러나 김호식 목사를 담임 목사로 받아들인 이후 교인 숫자나 재정에서 큰 발전을 이룩했지만, 원래 취지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모습도 보였다. 1983년 창립 30주년을 계기로 내부에서 창립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3년간 내분 끝에 1986년 김호식 목사가 향린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향린교회 신도들은 다음 사항을 공개 토론 끝에 결정했다.
바람직한 교회상
1) 교인수는 한 당회장이 돌볼 수 있는 정도(500명 내외)가 적당하며 그 이상이 되면 지교회를 만드는 방법을 강구한다.(분가선교)
2) 대내 경비는 최소화하고 대외 선교비를 극대화한다. 모든 교회 행사는 검소하게 하고 전임 교역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봉사직을 원칙으로 한다.
3) 어려운 교회를 돕는 일을 중점적으로 한다.

바람직한 목회자상
1) 교인들이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할 수 있도록 인격과 성실성, 검소한 생활 자세를 갖춘 분
2) 기독교의 진수를 전할 수 있는 분
3) 사회의 불의에 대해 예언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분
4) 청년들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분.
이러한 합의 아래 향린 교회는 1987년 1월, 홍근수 목사를 담임 목사로 받아들였다. 홍근수 목사는 민중신학과 진보적 신앙관을 내세우며 민주화 운동에도 적극 개입했다. 홍 목사는 1991년 2월 20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1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리고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향린교회는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된 곳 중 하나이다. 그후에도 향린교회는 끊임없이 사회 참여와 민주화, 인권 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향린교회는 이를 위해 생명환경위원회, 사회복지위원회같은 사회 참여를 목적으로 한 위원회를 두어 한국 사회의 첨예한 이슈에 대한 적극 대응하고 있으며, 지난 2008년 촛불 정국 당시에도 젊은 신도들은 향린교회라 씌여진 녹색 깃발 밑에 뭉쳐 함께 하기도 했다[각주:1]. 홍창의 장로는 향린교회의 지향점에 대해 아래와 같이 밝혔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향린교회의 초점은 주님이 그러했듯이 이 땅의 고통받고 이는 민중과 고난을 같이하며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참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구조악의 원인이 되어 있고 고통을 주고 있는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일이다. 즉 향린교회의 초점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선포하고 구현하는 일이다.

물론 홍목사 취임 이후 전 김호식 담임 목사를 추종하는 일부 신자들과 장로들이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등 시련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향린교회는 신도 수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추구하고 있다. 교회에 걸린 현수막에서도 향린교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담임 목사는 조헌정 목사로 2003년 6월부터 재직하고 있으며, 안병무-홍상근 목사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이런 역사와 사회 활동 참여를 특징으로 하는 향린 교회는 운영도 독특하다. 우리 전통 음악(국악)을 찬송가를 만들었으며, 찬송가를 부르는 성가대원들은 한복을 입는다. 향린교회는 교회 1곳이 대형화 되는 것을 막고자 일정한 수가 되면 분가한다. 1993년에 강남향린교회를 세웠고, 강남향린교회는 다시 들꽃향린교회를 설립했다. 이 3교회는 다른 대형교회와 달리 모-자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관계로 수평 관계에 있는 것이 다르다. 현 담임 목사 조헌영 목사는 취임한 이후 기성 교회의 폐쇄적 보수성을 깨야 한다며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했다. 담임 목사 및 장로는 종신 내지는 세습제가 아니라 임기 제도를 두었다. 또, 2004년 9월부터는 설교를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와 함께 진행하는 파격을 선보였는데, 향린교회가 애초 평신도들의 독립 교회로 출발했고, 초기에는 평신도들이 돌아가며 설교를 했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향린교회 신도들 입장에서는 파격이 아니라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헌영 목사는 지난 2005년 3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세상은 보수와 진보가 다 같이 필요하지만 한국 교회의 보수성은 너무 지나쳐 젊은이들이 발을 디딜 수 없게 해 한국 교회 출석자들의 평균 연령이 60살이 이르는 정도입니다. 이 상태로 가면 한국 교회는 노인들만 나오거나 유럽의 교회들처럼 건물만 남게 될 것입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