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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역사> [11월 5일] 2000년, 일본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 파문 발생: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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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역사> [11월 5일] 2000년, 일본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 파문 발생

김종현 | 기사입력 2009/11/04 [16:44]

<오늘의역사> [11월 5일] 2000년, 일본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 파문 발생

김종현 | 입력 : 2009/11/04 [16:44]


2000년 11월 5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70만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던 일본의 구석기 문화가 모두 날조된 사기극임을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로써 일본 고고학계와 일본은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마이니치이 신문은 미야기현 쓰기다테초 가미타카모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 도호쿠 문화연구소 부이사장 후지무라 신이치가 가짜 석기를 파묻는 장면을 보도했다. 이어 2002년 1월 15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중기 구석기(13만~3만년전)시대 유적으로 평가돼온 이와테(岩手)현 이와이즈미초(岩泉町)의 '효탄(瓢簞)'동굴 유적 또한 조작이었음을 밝혀졌고, 2003년 5월에 일본 고고학협회는 그동안 진행한 진상조사 결과 후지무라 신이치가 발굴했던 162종 4천여점의 구석기 유물이 모두 조작이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약 27만년전의 구석기 문화가 한반도에 있었음이 입증된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 발굴 이후 일본에 도 그 이상 가는 구석기 문화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초조감에 저질러진 역사 왜곡이었다. 후지무라 신이치가 발견하기 이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은 2만 7천년전의 것으로 전곡리 유적과 25만년이라는 시차가 있었다. 후지무라 신이치는 1981년 미야기(宮城)현에서 4만∼5만년 전 석기를 발견한 데 이어 93년 55만년 전, 95년 60만년 전, 99년 70만년 전 석기를 계속 발굴하면서 일본 내 구석기유적의 상한 연대를 엄청나게 부풀려왔다.

후지무라 신이치는 마이니치 신문과 인터뷰에서 1974년부터 유물 조작을 해왔다고 실토했다. 미야기현 발굴현장에서 마이니치 신문이 동영상으로 고스란히 촬영한 유적 조작 화면때문에 그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후지무라 신이치는 계속 유물 조작으로 일본의 구석기 시대를 늘려나갔지만 일본 우파와 문부성은 그의 연구 결과에 환호하며 교과서에도 그의 업적과 함께 일본 구석기 시대를 70만년으로 늘려나갔다.

조작 사건 폭로 이전에도 일본 고고학계 일부에서는 후지무라 신이치의 발굴 결과에 의심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일단 그가 발굴할때마다 구석기 시대 연대를 계속 높여나가는 이른바 "신의 손"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발굴했다는 유물의 이상한 점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 △발굴된 석기의 상태가 너무 깨끗한 점 △1980년대 이후 중요유물을 죄다 후지무라가 발굴한 점 △지각 변동이 심한 지층임에도 석기가 대부분 같은 깊이에서 발굴된 점 △가미타카모리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는 양면이 가공된 조몬(빗살무늬)토기와 비슷한 점 등이 지적되었지만, 일본 우익 세력과 문부성은 그런 의견들을 모두 무시했다.

그의 발굴이 조작이라는 것이 폭로되기 전부터 일본 우익은 한반도로부터 도래인을 극력 부인하기 위하여 60만 년 전 혹은 7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일본열도에 생존했다고 주장해왔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중학교 교과서 및 대부분의 고교 역사교과서는 일본사의 었뿌리가 얼마나 유구한지를 설명하는 구절로 첫 장을 시작했다. 처음 조작임이 드러난 미야기현의 가미타카모리 엉터리 선사유적은 산세이도, 짓쿄 출판, 야마가와 출판 등이 펴낸 문부성 검정필 교과서에 “50만∼60만년 전의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베이징 원인(北京原人)과 같은 단계의 인류가 아시아대륙을 통해 일본에 온 것이 분명하다“고 씌어 있다. 우익단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책에도 “가미타카모리 유적 연대는 78만년 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유물의 주인은 자바원인이나 베이징원인류로 추정된다”며 일본 역사의 유구함을 강조했다. 그 바탕이 바로 후지무라 신이치의 발굴 결과였는데 조작 사건이 폭로되자 교과서를 모두 다시 제작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이런 조작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조선 병합,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등을 미화한 것과는 조금 달리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보다 역사가 더 오래 되었으며, 자신들의 문화 연대가 더 앞선다는 점을 증명하여야 하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역사 왜곡의 대표 사례인 <일본 서기>에서 고대사를 왜곡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서기> 역시 일본이 한반도보다 앞선 국가였으며 한반도를 경략했던 우월한 국가였다는 점에 어떻게든 끼워맞추려 했던 책이다.

물론 구석기 시대 연대가 앞선다고 해서 반드시 그 나라의 문화가 앞선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인이 유물이 발견된 지역에 살던 구석기인들과 직접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나 잉글랜드에 살던 켈트인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로 앵글로-색슨족에게 쫓겨갔던 것처럼 잦은 이동과 부족간 전쟁으로 살던 사람들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은 기록이 없이 유물과 유적만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구석기 시대라도 한반도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신화로 바꾸려 애썼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 고고학계 주류 세력도 아마추어였던 후지무라 신이치와 도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의 발굴 결과를 짐짓 외면해왔다. 후지무라 신이치가 잇달아 3만~12만년전의 중기 구석기 유물과, 12만년전 이전의 전기 구석기시대 유물 등을 잇달아 발굴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말이다. 날조극이 밝혀진 후에야 "언제나 같은 사람이 깨끗한 상태의 석기를 무더기로 발굴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든가 "현장에서 다른 연구자들이 제대로 의문을 표하기만 했어도 금세 진위를 밝힐 수 있었다"면서 자신들 몸 지키기에 전전긍긍했다. 이런 현상은 한반도의 영향을

물론 이러한 유물/유적 조작 사건이 일본에 국한된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해군 충무공 해저유물발굴단 소속 한 해군 장교가 진급에 눈이 멀어 1992년에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별황자총통을 발굴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1996년에 이것이 그 장교가 골동품상과 짜고 가짜 별황자총통을 만들어 바다에 빠트린 다음에 건져냈다는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또, 세계 고고학 개론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필트다운맨 사건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이 업적을 세워서 개인 욕심을 채우고자 저질러진 일이라면 후지무라 신이치의 경우 우경화하는 일본 사회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벌어진 국수주의 성향의 사건이라는 점이 다르다. 미야기현은 조작극이 밝혀진 후에도 오랜동안 "그래도 뭔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거두지 않을 정도였다.

마이니치 신문은 특종 보도 2달 뒤에 취재 과정을 공개했다. 2000년 8월에 본사 간부로 전자우편으로 후지무라 신이치가 유물을 조작하고 있다는 제보를 했고, 8월부터 후지무라 신이치를 몰래 취재하기 시작했다. 일반 사진으로는 확실한 증거를 잡기 힘들고 나중에 사진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으므로 동영상 장비를 이용해서 후지무라 신이치를 먼 거리에서 촬영했다는 것이다. 몇 차례 촬영 실패를 거듭한 끝에 결국 미야기현 발굴 현장에서 후지무라 신이치가 가지고 온 조작한 물건을 몰래 땅속에 파묻는 광경을 제대로 촬영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문에 내보내기 전날인 11월 4일에 후지무라 신이치를 센다이시 호텔로 불러 VCR을 보여주고 인터뷰했다고 한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다는 명목으로, 과정은 상관없으니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일본 우익식 사고방식은 인류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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