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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3월 4일] 1193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죽다.: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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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3월 4일] 1193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죽다.

김종현 | 기사입력 2010/03/04 [01:42]

<오늘의 역사> [3월 4일] 1193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죽다.

김종현 | 입력 : 2010/03/04 [01:42]

1193년 3월 4일,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한 살라하딘(?al?? ad-D?n Y?suf ibn Ayy?b)이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죽었다. 살라흐 앗딘은 쿠르드족 무슬림 장군이자 전사였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으로서 3차 십자군 운동을 좌절시킨 이슬람의 영웅다. 그러나 적인 유럽인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고,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2세와는 적에서 친구가 되버린 사람이다. 살라흐 앗딘이라는 그의 이름은 아랍어로 "정의와 신념"이란 뜻이며, 3차 십자군 원정에 맞서서 이슬람 세계를 지도했으며, 전성기에 이집트, 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카, 헤자즈 등지를 아우르는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살라흐 앗딘은 비슷비슷한 발음의 이름을 갖고 있는데 언어때문에 발생하는 표기 차이일 뿐이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살라딘(Saladin) 또는 살라하딘이라고도 한다. 터키어 표기로는 Selahaddin Eyyubi이며, 쿠르드어로 는 Selah'edine Eyubi이다. 본래 이름은 유수프(Yousuf)이며, 정식 이름인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al?? ad-D?n Y?suf ibn Ayy?b)는 "욥의 아들이며 정의로운 신앙인 요셉"이란 뜻이다.

살라딘은 1138년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어난 쿠르드족이다. 아버지는 발베크의 영주 나짐 앗딘 아이유브(Najm ad-Din Ayyub)로서, 살라딘이 태어난 지 다음 해인 1139년에 티크리트에서 쫓겨나 모술로 가서 이마드 앗딘 장기(Imad ad-Din Zengi))의 부하가 되었다. 나짐 앗딘 아이유브를 발베크 요새 영주로 임명한 사람이 이마드 앗딘 장기다. 살라딘은 이곳에 정착하여 다마스커스에서 학업을 마치고 군사 지도자로서 훈육받았다.

살라딘이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 나선 것은 이집트의 이름뿐이던 칼리프 알 아디드가 죽은 1171년 9월 부터이다. 1163년에 살라딘은 숙부인 시르쿠를 수행하여 이집트 원정에 나섰고, 원정 6년째인 1169년에 시르쿠는 카이로에 입성하고 이집트를 정복하지만, 불과 두 달 만에 갑작스레 사망한다. 곧 이어 26세의 청년 살라딘이 총독이 되었으나, 살라딘이 이집트의 술탄으로서 정식으로 이집트를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이마드 앗딘 장기의 아들인 누르 앗딘이 사망한 후인 1174년부터다. 이집트를 장악한 살라딘은 시리아까지 장악하고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한 새로운 아이유브 왕조를 선언한다. 고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 세력을 소탕하고 십자군 세력과 싸우기 시작했다. 수니파 무슬림들은 그에게 희망을 걸었고, 신의 친구라는 뜻인 Waliullah라는 호칭을 선물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라는 두 지역을 장악한 살라딘은 팔레스타인 지방을 점령한 기독교 세력을 몰아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십자군과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1177년 11월 25일의 몽기사르 전투에서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샤티용의 레날드가 이끄는 십자군에 병력의 90%를 잃는 큰 패배를 당한 살라딘은 이집트로 물러나서 기독교 측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휴전 중에도 강경파인 사티용의 레날드(르노 드 샤티용)는 무슬림 상인들과 순례자들을 습격했으며,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위협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살라딘은 1183년과 1184년 응징 차원에서 샤티용이 다스리는 케락 성을 공격했고, 샤티용 또한 1185년 하지 순례자들을 공격해 보복하였다. 케락 성은 현재 요르단에 속해 있는 알 카라크(Al Karak)이며, 지금도 도시 고지대에 성이 남아 있다. 참고로, 이렇게 서로 공격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유럽쪽 기록에는 샤티용이 살라딘의 누이를 죽였다고 하는데, 이슬람측 기록에는 살라딘에게 누이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살라딘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려던 보두앵 4세가 1185년에, 그의 아들 보두앵 5세가 1186년에 잇달아 사망하고, 보두앵 4세의 여동생 시빌라가 여왕으로 등극하자, 시빌라의 남편 기 드 뤼지냥은 여왕의 남편이라는 지위로 살라딘과 맺은 휴전 협정을 깨고 전쟁을 일으켰다. 사티용의 레날드(르노 드 샤티용)도 이 전쟁에 참전했다. 1187년 7월 4일, 기 드 뤼지낭이 이끄는 기독교군과 살라딘군은 하틴에서 맞붙는다. 이 전투가 유명한 하틴 전투이 며 살라딘은 기독교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십자군의 재앙으로 끝난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사에 전환점이 되었다. 살라딘은 기 드 뤼지낭을 다마스커스로 보내 억류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포로들 중에서 단 2명을 처형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샤티용의 레날드다. 하틴 전투 후 기독교 세력이 지배하던 도시들을 탈환한 후, 전투 3개월 뒤인 10월 2일, 살라딘은 88년간 십자군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이슬람측 시각에서 바라보면 1089년 이래 88년만에 탈환한 것이다. 하틴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에 재입성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가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이다. 영화에서는 살라딘이 하틴 전투 후 곧 바로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처럼 이야기를 풀었지만, 실제로는 약 3개월 뒤에 벌어진 일이다. 예루살렘을 지키던 장수는 이벨린의 발리안(Balian of Ibelin)이었으며, 협상 끝에 살라딘은 몸값을 낸 기독교계 예루살렘 주민들을 모두 자유롭게 떠나도록 해주었다. 몸값을 내지 못한 주민 7,000 ~ 8,000명은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살라딘이 하틴 전투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자, 기독교 세계는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기 위해 3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중심은 영국의 리처드 1세였 다. 1191년 9월 7일, 두 사람은 아르수프에서 싸웠고 리처드 1세가 승리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간에 존경심을 품게 되어 이후에는 적이 아니라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결국 두 왕은 1192년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 하에 두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리처드 1세와 평화 협정을 맺은 지 1년 후인 1193년 3월 4일, 살라딘은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무덤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 복서쪽 모퉁이에 위치하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대리석 석관을 기증했지만, 살라딘의 시신은 여전히 석관 옆 목재 관에 안치되어 있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리처드 1세는 그가 최고의 이슬람 지도자라고 존경을 표한 바 있으며, 유럽인들에게는 관대하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알려졌다. 14세기경 그를 칭송하는 많은 시들이 나타났다. 단테 또한 그를 미덕을 갖춘 이교도로 묘사한 바 있으며, 월터 스코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저작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그리기도 했다.

이라크 독재자였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살라딘의 후예임을 자처했었다. 자신을 살라딘에 버금가는 아랍 수니파의 지도자로 자처하며 아랍의 패권을 쥐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후세인은 쿠르드족을 화학무기로 학살하며 심하게 탄압했다. 지금도 쿠르드 족은 중동에서 팔레스타인인과 더불어 2대 나라 없는 민족으로 터키, 이란, 이라크에서 살고 있다. 터키는 지금도 쿠르드족을 탄압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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