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0월 6일, 이집트 공화국의 3대 대통령 안와르 엘 사다트 (Anwar El Sadat)가 4차 중동전쟁 8주년 기념 군사 열병식 도중에 암살당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사다트는 대외 관계 개선에 노력을 기울여 특히 서방과 관계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2년에는 이집트에 충분한 군사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집트에 들어와 있던 소련 기술자들과 군사고문단을 추방하기도 했다.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 이전 국경으로 물러서야 한다고 UN에 강조했다. 이는 6일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있던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라는 요구였지만, 이스라엘은 이 조건을 거부했다. 1973년 10월 6일, 시리아와 연합한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선제 공격한 것은 사다트가 서방, 특히 미국과 관계 개선을 추구하긴 했지만 시나이 반도를 그대로 이스라엘에 뺐긴 상태에서는 국내에서 아무런 지지를 얻을 수 없기때문이었다. 비록 전쟁의 결과는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고, 사다트는 낫세르 시대에 잃었던 영토를 되찾은 사람으로 이집트 국내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사다트는 이스라엘 및 미국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되었다. 특히 1977년 11월 19일 아랍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이스라엘 의회인 크네세트에서 평화 계획을 제안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78년에는 이스라엘 수상 메나햄 베긴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1979년 3월 26일에는 아랍권 및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기에 이르렀다. 이후 이집트에는 소련 대신 미국의 군사 지원이 제공되었고, 오늘날 이집트 육군은 M1A1 전차를 비롯한 미국제 무기를 상당히 많이 수입한 국가가 되었다. 사다트 암살 후 대통령이 된 호스니 무바라크 현 이집트 대통령 역시 대외 관계 부문에서는 친서방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다트는 서방권에서 인기는 올라갔으나 정작 이집트 국내에서는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 자체를 반대하는 세력이 강력히 반발했고, 여기에 경제 위기까지 발생하여 인기가 떨어져갔다. 그러던 와중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군열병식 도중에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했던 것이다. 한편, 이 날은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의 선제 공격으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날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엔티엠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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