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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역사] [11월 12일] 1989년, 사노맹 결성 발표.

김종현 | 기사입력 2009/11/11 [07:56]

<오늘의역사] [11월 12일] 1989년, 사노맹 결성 발표.

김종현 | 입력 : 2009/11/11 [07:56]

1989년 11월 12일, ‘지역별·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가 주최한 서울대 집회에서  “전면적인 계급전쟁의 시작을 선포하며 부르좌 지배체제를 사회주의혁명의 불길로 살라버리자”는 내용의 출범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공개 석상에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 결성을 선언했다.

주도자는 박노해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졌던 박기평,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백태웅 등이었으며, 1988년 4월에 박노해, 백태웅 등을 중심으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989년 1월 민족민주혁명론(NDR)을 추종하는 핵심 세력 140명을 끌어들인 후 10개월 만에 조직 결성을 발표했던 것이다. 사노맹은 노동자 중심의 민중통일전선 형성→노동자 전위당 결성→무장봉기를 통한 혁명→민중공화국 수립→자본주의 철폐 및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전국 규모의 조직을 결성했다.

사노맹은 1980년대 이후 성장해온 반독재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자생한 사회주의 전위 조직이다. 이전의 유사한 사건이 친북 성향이자 북한과 직간접 방법으로 연계하여 만들어진 것과 달리 사노맹은 남북한 정권을 모두 비판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이 조직을 국가보안법 상에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고 1990년 9월 19일에 처음으로 관련자들을 구속하면서 사노맹 관련자들을 체포 및 구속하기 시작했다. 이미 사노맹 출범선언문이 공개된 후부터 수사를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에는 1990년 9월 25일 처음 보도되었다. 1991년 3월 10일 박노해가 구속되고, 1992년 4월 29일에 백태웅을 비롯한 중앙위원과 주요 간부 전부가 검거되면서 와해되었다.

1999년 3월 1일자로 잔형면제의 특별 사면 및 복권 조치를 받았다. 시사저널은 1997년 01월 16일 자에서 복역 중이던 박노해, 백태웅 등 가장 핵심 조직원들이 모두 사노맹 재건과 사회주의 혁명을 모두 단념하고 다른 노선을 고민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실제로 이들 핵심 조직원들은 출소 후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박노해는 형 면제로 출소한 다음 "나눔문화"라는 단체를 만들어 평화 운동에 전념하고 있고, 백태웅은 미국에서 인권 변호사로 경력을 쌓고 있다. 백태웅은 감옥 안에서도 우리 사회의 미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새로운 성격 규정,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접목할 가능성, 시장 경제, 사회주의의 독점자본 국유화 정책 재검토 등을 연구했다고 한다. 사노맹 사건 때문에 국제사면위원회로부터 ‘양심수’로 선정된 바 있고, 5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던 조국은 현재 서울대 법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기도 하다.

2008년 12월 22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이하 "보상위원회")에서 사노맹 사건 관련자를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하면서 이들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보상위원회가 좌파 소굴이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보도하기도 했으며,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들은 이들이 북한도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이들을 북한의 간첩이라고 맹비난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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