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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9월 11일] 1973년, 칠레에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 발발:엔티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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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9월 11일] 1973년, 칠레에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 발발

김종현 | 기사입력 2008/09/11 [08:35]

<오늘의 역사> [9월 11일] 1973년, 칠레에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 발발

김종현 | 입력 : 2008/09/11 [08:35]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과 사회주의 정권을 축출하고 우익 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당시 육군참모총장 아우구스트 피노체트(Augusto Pinochet)가 군사 쿠테타를 일으켰다.
(대통령궁을 포위한 쿠데타군)

1970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살바도르 아옌데는 1등을 했다. 그러나 과반수 달성에는 실패하여 과반수 달성 실패 시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칠레 법에 따라 우익인 기독민주당과 연정을 수립하고서야 겨우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당시 칠레 경제는 이전 보수 정권 하에서 경제가 매우 어려워진 상태였으며, 대통령 취임 이후 아옌데는 연정파트너였던 기독민주당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각종 산업의 국유화를 포함한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이때문에 칠레 내의 우익 세력과 미국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특히 미국은 원래 미국 회사였던 구리 회사가 아옌데 정권의 국유화 정책으로 보상도 받지 못하고 빼앗겼다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1973년 3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아옌데를 지지하는 인민연합(사회주의와 공산주의자들의 연합)이 45%로 대승을 거두자 칠레 내 극우 세력들은 정부 전복 음모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보수세력들은 일부러 경제를 혼란에 빠뜨려 아옌데 정권을 흔들었지만, 아옌데는 민중의 지지와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버텼다. 이에 미국은 반체제세력을 지원했으며, 기밀해제된 CIA문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CIA를 통해 1970년 ~ 1973년 사이에 800만 달러를 칠레의 반아옌데 세력에 지원했다. 

1973년 6월 29일, Roberto Souper 대령이 전차연대를 이끌고 아옌데 정권에 반대하는 1차 쿠테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후, 아옌데는 육군참모총장 프라트 장군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고, 새로 산티아고 방위사령부 사령관이던 아우구스트 피노체트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아옌데는 충성 대신에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릴 쿠테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칠레 공군의 폭격을 당하고 있는 칠레 대통령궁)

9월 11일 오전 7시, 칠레 해군이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해병대가 라디오 및 TV 방송국을 비롯한 산티아고 시내의 전략 거점을 점령다. 미국이 지원한 피노체트의 쿠타테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옌데는 즉시 경호원들과 함께 모네다 대통령궁으로 들어갔다. 쿠테타군이 점령하지 못한 다른 방송국들은 공군이 폭격했다. 아옌데는 해군 지휘관 몬테로 제독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몬테로는 전화선을 잘라버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쿠테트 주동자 피노체를 비롯한 다른 음모자들도 함께 있었다. 오전 9시, 산티아고 중심부를 제외한 칠레 전역을 장악했다. 아옌데는 항복하라는 쿠테타군의 요구와 모네다 대통령궁을 떠나 산티아고 남부 산업지대에 들어가 노동자들과 함께 저항하자는 사회주의자들의 제안 모두를 거절했다.  오전 10시 40분, 항복 협상이 지연되자 칠레 공군의 호커 헌터 전투기가 모네다궁을 폭격했으며, 피노체트는 전차와 보병들로 모네다궁을 완전히 포위했다. 칠레 경찰도 쿠테타에 가담했다. 하지만 아옌데는 항복할 뜻이 없었고, 피노체트도 아옌데가 항복해도 죽일 계획이었다.  정오, 아옌데는 카스트로가 선물했다는 AK-47로 자살했다. 

쿠테타 이후 피노체트는 군사평의회를 만들어 의장이 되어 17년간 칠레를 철권통치했다. 쿠데타 후 1주일 동안 3만여명이 처형되었고, 피노체트의 17년 통치 기간 동안 3천 명의 사망자, 1천 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고 10만명이 고문으로 불구가 되고,  100만명이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그렇다고 민주화 운동과 군사 독재 정권이 질식사하지 않았으며, 결국 피노체트는 1991년 선거에서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칠레 정부는 피노체트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런던에서 요양을 하던 피노체트는 1998년 10월, 영국 사법 당국에 체포되었다. 독재 시절 국가 폭력 피해자 중에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한 스페인 국민 납치사건 80건때문에 스페인 정부가 국제 수배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피노체트는 영국, 칠레, 스페인 간에 외교문제가 되어 질질 끌다가 2000년 3월 건강 사유로 석방되어 칠레로 귀국했다. 칠레 사법부는 독재자를 반드시 처벌한다는 신념에 따라 그를 가택 연금했으며, 약 300여 건의 국가범죄로 기소했으나 2006년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사법적인 처벌은 행해지지 못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이 쿠테타에 깊이 관여한 것이 관련 기밀 문서의 기빌 보호 기간이 해제되면서 현재 속속 드러나고 있으며, 키신저를 칠레 쿠테타를 비롯한 여러 건으로 "전범"으로 규정한 <키신저 재판>이란 제목의 책도 출간되었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쿠테타 발발 후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라디오 연설을 했다.

"지금이 분명 여러분께 연설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공군이 라디오 마가야네스의 안테나를 폭격했습니다. 저는 실망과 괴로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 말은 충성 서약을 어긴 자들에 대한 도덕적 심판이 돼야 마땅합니다. 칠레의 군인이고 명색이 합참의장이면서 해군 참모총장이기도 한 메리노 제독, 게다가 어제까지도 정부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맹세했으면서 지금은 경찰총장을 자임하는 저 비굴한 멘도사 장군 같은 자들 말입니다. 이 모든 작태에 맞서 저는 노동자들에게 오직 이렇게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결코 사임하지 않는다고! 

이 역사적 갈림길에서 저는 민중의 충성에 제 생명으로 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께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수천, 수만 칠레인들의 소중한 양심에 심어 놓은 씨앗들은 일격에 베어 쓰러뜨릴 수 있는 게 아님을 확신한다고. 

저들은 힘을 가졌습니다. 저들은 우릴 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범죄 행위로도, 무력으로도 사회 진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만드는 건 민중입니다. 이 나라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지켜왔던 그 충성, 여러분이 이사람, 다만 정의를 향한 크나큰 열망의 통역자였고 헌법의 존중을 맹세했으며 이것을 지킨 한 사람에게 보여준 그 신뢰에 감사드리고자 합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연설을 통해 저는 여러분이 이 교훈을 얻길 바랍니다. 국내의 반동 세력과 결탁한 외국 자본과 제국주의가, 군대가 자신의 전통을-군 출신이면서도 그 희생양이 된 분들, 즉 슈나이더 장군이 가르쳐 줬고 아라야 사령관이 다시 확인한 그 전통을-깨버리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것 말입니다. 이제 오늘 저들 반동 세력은 자신들의 이윤과 특권을 끈질기게 지키기 위해 외세의 힘을 빌려 권력을 탈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 박해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제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제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저의 마지막 말입니다. 저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연설은 쿠테타군이 미처 장악하지 못한 국영 마가야네스 라디오 방송을 타고 송출되었다



(아옌데의 마지막 사진. 쿠데타 당일, 경호원들에 둘러쌓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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